나, 일상, 삶, 그리고...

여덟 알의 은행으로 남은 하루!!

오애도 2002. 9. 9. 05:38
단 하루, 혹은 이틀을 상관으로 날씨가 한나라당하고 민주당만큼이나 차이가 납니다.-가만, 둘 다 똑같은가!!^^;;-
먹지 말아야지 했다가 뒤늦게 먹은 저녁이 목 밑까지 차오르는 소화불량 증세도 있고, 바
람만 불면 그야말로 바람난 처자가 되어 버리는 탓에 실실 산책을 나갔습니다. 사흘 연속
착하게 그것도 두 시간 여를 걷게 되는 것도 순전히 이 바람 사랑하는 증세 탓일 것입니다.
^^
무더운 여름밤의 산책이 씩씩하게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마른 바람이 부는
가을밤의 걷기는 충분히 누려도 좋을 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쨋거나 어젯밤에도 씩씩하게 두 시간 여를 걷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은행을 털고 있는 여자를 봤습니다.-국민은행이나 기업은행 이런거
아니구요^^;;-
'여자'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야말로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음... 백화점이나 시장에서 껍질 까놓은 은행 가격이 만만찮은 것을 봅니다. 그런 연유로 이
렇게 은행이 익어 가는 때면 그것을 일을 삼아 줍거나 털어가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
다.
흔히 그렇게 밤중에 몰래 은행을 털어가는-??- 사람들은 나이 지긋한 아줌씨거나 조금은
후줄근한 차림의 할머니들이었는데 흰 블라우스에 긴 머리, 그리고 날씬한 몸매에 고운 얼
굴을 하고 있는, 조금은 노블해-??-뵈는 여자가 혼자서 은행을 털고-??- 있는 것을 보자니
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길고 두툼한 각목까지 들고서 말입니다.
아직은 그다지 잘 여물지 않은 탓에 뭐 은행은 생각보다 잘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삼 년 전 쯤이었던가요. 지금처럼 은행이 아직 덜 여물었을 때였을 것입니다.
아는 분하고 길을 가는데 자그마한 은행나무 밑에 은행 몇 개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역시
나 어려서 없이 산 탓에 ^^;; 먹는 것이 떨어져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나는, 오잉, 은행이네...
하면서 그것들을 주웠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분이 나무 위를 올려다보시더니 툭 하고 발로
밑둥을 찼습니다.
그러자 오잉!! 잘 익은 은행들이 후두두둑 하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웬 날
벼락, 아니 은행 벼락?
다른 나무들은 아직 시퍼런 열매였는데, 그 나무만 누렇게 익은 것을 보니 아마 올은행나
무였던 모양입니다.
어쨋거나 그 분은 신나셔서 계속 발로 툭툭 찼고, 별로 크지도 않은 나무에서는 자꾸만 자
꾸만 은행이 떨어졌습니다. 나는 시장 가려고 가방 속에 넣어왔던 비닐 봉지를 꺼내서 그것
들을 주워 담았습니다. 다 줍고 보니 양이 꽤 많았습니다.
슈퍼 가려는 것도 그만두고 집에 와서는 냄새를 참아가며 겉껍질을 제거하고 잘 말렸습니
다. 그리고는 여기저기 조금씩 나눠주고도 꽤 많이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겨우내 먹어
치웠습니다. 뭐 은행 탓인지 그해 겨울은 목감기 같은 것은 걸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게다가 그 해는 어쩐 일인지 가으내 바람이 자주 불어댔던 탓에, 실실 산책을 나가면 발
밑에 은행들이 그야말로 널려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엔 밤중에 산책하러 나갈
때는 아예 비닐봉지 들고 다녔습니다. -3년 전 쯤 밤중에 아미가 호텔 앞에서 붉은 색 남방
입고 은행 줍는 '여자' 봤으면 바로 접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로 은행을 먹어야 할 때, 혹은 먹고 싶을 때에도 그것을 돈주고 사는
일을 할 수 없게 되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왠지 바람이 설렁설렁 불고 난 후 밤중에 비닐
봉지 들고 주워다 먹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지요. 후후

요새 며칠처럼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고 있으면 그것들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나무 위를 쳐다보게 되는데 가끔은 너무나 탐스럽게 달려 있는 열매들이
자못 감동적이기까지 합니다.
한 두 개 떨어져 있는 은행들은 왠지 줍기도, 그냥 두고 가기도 망설여지는 마음의 시험을
하게 합니다. -나는 물론 씩씩하게 줍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리고는 툭하고 나무밑둥을
차보기도 하구요^^;;-
하여 어젯밤 열두시 넘어 산책 갔다가 은행 여덟 알을 주워왔습니다. 아직 덜 익었는지 겉
껍질에 푸르뎅뎅한 기운이 남아 있긴 했지만 얼마나 큼직하게 실하던지요.

자 그리하여 가을인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산책갈 때 그 착착 접어지는 등산용 지팡이라고 들고 다녀야겠습니다. 후후
가끔 잘 익은 은행들이 열려 있는 나무들을 보면 툭툭 쳐서 떨어져내리는 것을 줍는 즐거움
을 누려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잘 달궈진 팬에서 볶아진 은행 색깔의 아름다움!!
아시지요?
그 감동적인 자연의 색깔!!

아름다운 가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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