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울엄니... 이젠 늙으셨습니다

오애도 2004. 7. 29. 11:26

주말에 집엘 다녀왔습니다.

장마 끝나고 기분 나쁘게 습도 높은 더위땜에 가끔 혼자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날씨에게 투덜투덜 했었습니다.

나만 그런 것인지 어쩐 것인지 날씨가 고약하게 심술을 부리면 꼭 살아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그만 좀해라. 어디가 나쁘냐. 너 미친 거 아니냐... 어쩌구 정말 리얼하게 투덜댑니다.

아마 애니미즘 성행했던 선사시대에 살았다면 당연히 나는 주술성 뛰어난 무당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ㅋㅋ

어쨌거나 수영 마치고 가느라 느지막히 떠났는데 다행히 더위는 그 전 며칠에 비해 수긋했었습니다.

 

컴컴할 때 들어갔더니 울엄니 호박잎 쪄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한참 다이어트 한다고 밥 먹는 거에 인색을 떨었는데 그날 저녁밥 두 그릇 먹었습니다. -밤에 속 더부룩 부댁껴서 죽는 줄 알았음-

 

사실 집에 가면 늘 그렇습니다.

낡은 집에 울엄니 혼자 계시는데다 여름이면 워낙 바쁘신 터라 나는 조용한 집에서 혼자 뒹굴거리게 됩니다.

 

엄니는 새벽에 이웃집 밭일 도와준다고 가셨고-다섯 시- 나는 겨우 다섯 시쯤 잠이 들었습니다.-자릴 옮기면 첫날은 거의 샌다. 성질 더러버서...-

여덟시쯤 엄니는 딸래미 준다고 옥수수 두 개랑 못생긴 복숭아 몇 개-맛은 있었다.- 얻어 오셨습니다.

어제 사온 안동 간 고등어를 구워 엄니랑 마주앉아 두런 거리며 아침을 먹었습니다.

 

엄니는 나가시고 나는 종일 혼자서 뒹굴거렸습니다.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하는 '사선에서'를 다시 보고-죤 말코비치는 어쨌든 악역에 최고다-, 다른 채널에서 '마이너리티 리포트' '미션 임파서블'을 역시나 다시 봤습니다. -톰 크루즈 홍수 로군...-

같는 영화를 두 번 이상 보는 것은 꼭 등산에서 내려올 때의 기분 하고 비슷합니다.

산에 올라가느라 놓치거나 보지 못했던 것들을 꼼꼼히 볼 수 있거든요.

 

어쨌거나 종일 선풍기 틀어놓고 앉았다 누웠다, 좀 있다 나가서 찐 옥수수 한 개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복숭아 몇 개 깎아 먹고, 괜히 창밖도 한 번 내다 보고, 마당도 한 번 어슬렁거리고...

 

아주 오래 전 학교 졸업하고 그야말로 날건달 노릇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며칠 집에 내려가 있을 때면 울엄니는 바로 이웃의 휴게소로 아르바이트 일을 하러 가시고 젊은 나는 엄니가 새벽에 해 놓으신 밥을 하루종일 먹으며 뒹굴거렸었지요.

 

일상은 어딘지 막막하고, 나는 세상에 잘못 던져져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지만 티 안내고 있을 때였지요.

뒤꼍 텃밭 밑에서 화장실 앞까지는 채송화가 지천이었습니다.

그 해 여름이 아마 내 생애 있어서 가장 막막했을 때 였을지도 모릅니다.  

절망이나 좌절이 아닌 그냥 막막함이었습니다.

그 후 때때로 절망하고 우울했어도 그렇게 막막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 때의 막막함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밖은 조용하고 하루 종일 매미가 울고 햇빛은 빈 마당에 가득 비추고 있었지요.

나는 창호지 바른 뒷문과 앞문을 열어 놓고는,  내려갈 때 들고간 책 몇 권을 배를 깔고 누워 들여다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상당히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같지만 그렇게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빈혈환자 처럼 앞날이 까맸었는데 어떤 방법으로 그걸 걷어낼 지 아득했었습니다. 

그 때 불확실하고 불 투명했던 미래가 지금인데 그때보다 더 나은 것인지 어쩐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때처럼 막막해진 적은 없는데-대신 짜증, 투덜거림, 무의욕, 때로는 되도 않는 얄팍한 욕심에 시달린다- 그것은 아마 그 때에 비해 사는 데 좀 노련해졌거나 아니면 좀 요령이 생겼거나 그도 아니면 세상이 좀 만만해 보이는 건방이 생겼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요.

하여 저녁에는 전 날 사들고 간 닭 한마리로 백숙을 해서 역시나 울엄니랑 머릴 맞대고 두런거리며 먹었습니다.

 

여름 날 시골집엘 가면 풍경은 늘 비슷합니다.

울엄니는 종종거리며 늘 바쁘시고 나이 먹었으되 어린-??-딸은 방에서 앉았다 일어났다...

 

다만 이번 여름엔 울엄니... 많이 늙으셨더랬습니다.

이젠 정말 기운 없는 할머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이 늙으셨더랬습니다.

한번도 울엄니는 울엄니지 할머니란 생각이 든 적 없었습니다.

 

그런데 울엄니...

정말 할머니였습니다.

무슨 일이든 겁 안내고 씩씩하셨던 울엄니는 이제 산에서 내려올 때 발 딛는 것이 겁이 난다고 하셨던 지난 겨울 이래로 나는 울엄니가 칠십 노인이라는 것을 객관적 사실로 인식하기 시작했었습니다.

조금씩 엄니 얼굴에서 기운이 빠져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부지 살아계실 적에 아마 울엄니는 기운 빠질 틈도, 늙으실 틈도 없었는지 모릅니다.

저녁에 오는데 울엄니 짐 들어다주랴?? 하셨습니다. 작년까지도 울엄니 무거운 거 있으면 버스 정류장까지 들어다 주셨더랬습니다.

 

당신 늙은 거 울엄니 모르시는 것인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드러나게 눈물이 차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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