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거대함과 미세함 사이의 초라

사람은 언제나 죽고 어디에서나 죽는 거야

오애도 2016. 11. 24. 00:41

  

마지막 잎새는 오 헨리의 명 단편 소설입니다.

또한 청소년을 위한 공연예술축제의 첫 번째로 올려진 작품이기도 합니다.

알려지거나 익숙해진 것에는 악덕과 미덕이 함께 있지요.

드라마라는 게 다음 사건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 이야기의 힘으로 재미를 이끌어 내야하는 기본 목적에의 위반이 악덕이라면 익숙한 것에의 편안함과 원작이 갖고 있는 뛰어난 작품성에 대한 기본 가치에 기댄다는 측면에서는 미덕입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그 미덕은 졸지에 두 배의 악덕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청소년 연극 '마지막 잎새'는 그러나 그 미덕을 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나름 잘 엮어낸 이야기와 잘 버무린 소소한 요소들-노래와 무대 장치-를 통해 예쁜 연극을 만들어냈습니다.

사람은 오래 전부터 죽었고 어디에서나 죽어...’

죤시와 친구가 방을 얻으러 왔을 때 문지기 영감이 폐병 환자가 죽어나간 재수 없는 방이니까 예쁜 아가씨들이 살기에는 맞지 않는다고 말립니다. 그 말을 듣고 무서워하는 죤시에게 친구가 하는 대답입니다.

그렇지요. 사람은 어디에서나 죽고 언제나 죽는 것이지요. 그 죽음들 속에서 혹은 그 죽음들 위에서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문지기 영감의 장렬한 죽음은 죤시의 생명을 살려냅니다. 그 죽음 위에서 죤시는 살아가는 것이지요.

원작의 주제가 문지기 영감의 예술혼-??-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 연극의 주제는 삶의 소중함입니다. 생명의 소중함이 아닌 삶의 소중함... 생명이 소중한 것은 삶의 의욕이 충만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의욕은 존재 자체와 그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아야만 비로소 넘쳐나는 것이지요.

죤시는 비바람 견뎌내고 남아 있는 마지막 담쟁이 잎을 통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문지기 영감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산다는 것이 어떻게 가치 있는 것인지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자신의 장례식에 올 사람을 세기 시작하면 그 환자는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이 지나고 죤시는 하나 둘 담쟁이덩굴의 잎을 세기 시작합니다. 그 부분은 기술적으로 절묘하게 배치를 해놔서 언뜻 정말로 장례식에 올 사람들의 숫자를 세는 것처럼 보이는데 뜻밖에 묘하게 여운이 남습니다. 올 사람의 숫자를 세는 방법은 카운트 업일 텐데 떨어지는 나뭇잎의 숫자는 카운트 다운... 와야 할 사람과 떨어지는 나뭇잎... 절묘한 대비를 이루는 장면이지요.

 

늦가을 머리채를 흔들며 쓸쓸한 바람이 지나가고 발밑으로 휘휘 낙엽들이 몰려다니는 대학로를 지나 저기 끄트머리쯤에 있는 종로의 '아이들 극장'에서 그렇게 예쁜 연극 한편을 봤습니다.

 


     2016 청소년 공연 예술 축제를 보고 리뷰를 부탁받았습니다.

   일반인 심사도 맡았지만 아직 첫 번째 작품만을 본 것이고 심사와는 상관없이 그저 내 스타일의 리뷰로 쓰고 있습니다. 아마 공식 페이스북에 올라가겠지요. 경연 형식이긴 하지만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터라 무겁게 쓰지 않았는데 메일로 보내고 나니 오타에 비문 따위가 눈에 띕니다.

 덕분에 일주일에 두어 번 모처럼 대학로 거리를 걷습니다. 연극으로 밥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어딘가 내겐 꿈의 거리였던 곳이지요. 대학로를 지나고 종로 5가까지 걸어나와 광장시장도 구경하고 어느 땐 종로 2가까지 걷습니다.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한 거리를 걸으면서 불쑥불쑥 엄니를 생각합니다. 아직도 가끔 꺽꺽 가슴이 아파서 잠시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씩씩하고 씩씩하게 자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