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어 이번 주에도 퇴원한 엄니 계신 청주에 다녀왔다. 물리적으로는 많이 좋아지셨지만 심리적 정신적으로는 아직도 상한 부분의 회복이 더디다.
평생 다섯 자식과 병약한 아버지까지 무겁게 지고 사시다가 이제 다아 내려놓고 조금 가벼워졌는데 문득 당신이 자식들한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참혹한 공포가 엄니를 우울의 심연에서 쉽게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리라.
낮에 제대로 생각이 돌아올 때면 숨이 헉헉 차오를 때까지 걷고 또 걷는 연습을 하는 엄니를 보면서 그 작은 몸과 좁은 어깨에 덕지덕지 얹힌 불안과 공포와 슬픔을 나는 고스란히 읽어냈다.
저녁에 다시 멍해지시길레 엄니 약드려요? 했더니
약 읎댜?
무슨 약?
의사한테 달라고 했더니 읎댜~
무슨 약?
먹으면 바로 죽는 약...
평생을, 죽을 거 같이 힘들 때도 엄니는 온전히 누구에게도 기댈 수도, 기대 본 적도 없으셨다는 걸 나는 안다.
기억력 좋고 그 기억력으로 판단하는데 대단히 뛰어난 나는 엄니의 그 신산한 세월을 속속들이 짚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 판단으로 지금 엄니가 헤매고 있는 절망과 공포, 참혹함의 색깔이 어떤 것인지도 안다. 난 그 정도는 명민하다.
그날 밤 나는 잠든 엄니 옆에서 무릎 꿇고 하나님과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영혼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울엄니 덜 힘들게 해달라고...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주책없이 또 눈물 줄줄이었다.
나는 내 어머니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지극한 효심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자식이나 배우자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사실 '나' 자신에 대한 연민 , '내 것'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것이라면 부모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순전히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연민이며 인간의 삶에 대한 쓸쓸함에서 느껴지는 슬픔에서 오는 것이다.
영화 '수상한 그녀'를 열 네 살짜리 제자와 봤다.
영화 보면서 내내 나는 내 어머니를, 수많은 다른 어머니를, 그리고 이 시대의 노인들을, 내가 늙었을 때를 생각했다.
가슴 아프고 가슴 찡하고 유쾌하게 자알 만든 영화.
늘 얘기하지만 현실에 따라 드라마에는 비극의 시대가 있고 코미디의 시대가 있고 멜로드라마의 시대가 있고... 티비 드라마도 영화도 요즘은 분명 환타지의 시대인 모양이다.
세상이 환타지라는 게 아니라 환타지밖에 기댈 게 없는 희망의 불모시대라는 말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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