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먹고 오늘은 반찬을 만들었습니다.
며칠 전 세일하길레 사 놓은 가지를 들기름 넣고 볶아서 잘 담아놓았구요. 어제 하나로마트에서 사촌 언니가 사서 나눠준 오이지 무침도 했습니다. 집에 와서 무치려고 보니 이게 굉장히 자알 담가진 오이지더군요. 노오랗게 익은데다 지나치게 짜지도 않아서 쫑쫑 썰어 그냥 꼬옥 짜서 고춧가루 마늘 통깨 설탕 참기름 넣고 약간 바락바락 무쳤더니 대단히 맛있습니다. 역시 피망 사다 놓은 것도 있어서 고추잡채 하려고 느타리 버섯 사다가 데쳐 놓았습니다. 이건 내일, 먹기 직전에 만들어야 하거든요. 냉동실에 있던 잔멸치도 자알 달군 후라이팬에 넣고 휘리릭 볶아 꿀 듬뿍 넣어 빠삭하니 볶았습니다.
역시 하나로에서 사 온 명란젓도 있구요. 부침두부 한 모는 내일 바삭하게 부친 후에 조선간장 부어 놨다가 장아찌로 먹을 생각입니다.
하여 냉장고에 거의 한정식 수준의 밑반찬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다만 김치가 없어서 내일은 열무김치를 담글까 생각 중입니다.
마음과 생각이 저기 계곡 밑을 헤매는 동안 하루종일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픈 기이한 경험을 꽤 길게 했습니다. 덕분에 체중은 4킬로 쯤 줄었고 머리카락은 푸석거리고 입 안도 헐고 뭐 후유증이 제법 있었지요. 날도 더워서 불 앞에서 뭔가 꼼지락거리면서 하는 것도 귀찮아 쥬스나 홀짝거리고 정 아쉬우면 편의점 삼각김밥이나 도시락 같은 걸로 때우기도 했구요.
역시 삶의 의욕과 식욕은 비례하는 법.
그동안 심리적 정신적인 이유로 식욕이 떨어져 본 적이 없었던 걸 보면 나란 인간은 늘 되도않게 으쌰~ 하고 산 게 확실합니다. ^^
계곡에서 올라오니 제일 많이 먹고 싶은 게 생뚱맞게 만두였습니다. 호박 사다가 여름만두인 편수를 만들까 하다가 날이 너무 더워 그만뒀습니다. 대신 냉동만두 사다가 만둣국으로 끓여 두 끼 쯤 먹었더니 해갈-??-이 됐습니다. 날 좀 선선해지면 편수 만들어 먹어야겠습니다.
요 며칠 새에 바느질을 해서 파우치를 총 여섯 개 만들었고 가방을 한 개 만들었으며 화장실에선 여전히 우리말 책을 뒤적였고 부탁받은 원고를 주럽을 싸며 첨삭을 했고 프랑스 혁명사를 다시 읽기 시작했으며 거의 한 달 동안 날이면 날마다 명탐정 코난, 탐정학원 Q , 소년탐정 김전일 뭐 이런 만화영화들을 쉬지 않고 봤으며, 다시 머릴 싸매고 시장에 관한 공부를 했습니다.
월말까지 써야 하는 대본이 있어서 머리 한 쪽이 꽉 차서 무겁긴 하지만 그래도 으쌰~ 살아났습니다.
지난 두어 달 동안의 경험이 내 삶의 중요한 여러가지 것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반성과 깨달음이 없는 고뇌는 그저 투덜거림이나 자신의 삶에 대한 '떼'에 불과한 지도 모르지요.
아마 신은 뭔가 크고 귀한 것을 조만간 주시려는 모양입니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기대 만땅입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실패의 기록 때문에 유쾌하진 않지만 우리말 겨루기 공부하면서 그래도 놀라운 자신감 하나는 얻었습니다. 하루에 열 여섯 시간 씩 무언가 몰두할 힘이 내게 있다는 것.
모든 것은 지나가는 법.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도 끝났고 출구 없이 몰아대던 더위도 이제 슬슬 아침 저녁으로는 기세를 꺾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젊은 시절이 훌쩍 지나갔듯이 그렇게 살아있는 날들도 지나가겠지요.
내내... 언제 죽든 잘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고 살다가 폐 끼치지 않고 죽을 수 있을까가 앞으로 살아가는 내내의 화두가 될 것입니다.
나 죽으면 가슴 절절히 애통해 할 사람이 그래도 물리적으로 나보다는 먼저 가실 내 어머니 뿐이라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세상의 원리가 내가 뿌려 놓은 게 많으면 거두는 게 많듯이 또한 잃을 것도 많아지는 것이지요. 가족-자식이나 남편이나 뭐 이런...-이 없으니 내가 두고 떠나거나 또한 나를 두고 떠나는 것처럼 잃을 것이 없어 다행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아 봅니다. ㅎㅎ.
가을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가을엔 부석사엘 다시 가 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