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낮에...
일하러 가기 위해 '대로' 라고 이름 붙여진 8차선 도롯가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일상이라는 게 이상해서 물리적인 거야 하나도 다를 것 없는데 일요일의 공기와 토요일의 공기와 월요일의 공기는 부피와 질감과 농담-??-에 묘한 차이를 보인다.
일요일 낮의 공기는 얄팍하게 가볍고, 훨씬 날렵한 속도로 운동을 할 것 같고 -그걸 대류라고 하던가??!-분명 느슨하고 할랑하이 밀도의 차이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 우리들이 어깨에 얹고 다니는 공기의 무게보다 훨씬 적은 무게가 얹혀져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그렇게 버스 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아줌씨가 혹 수원가는 버스가 여기서 서느냐고 물었다.
여기 아니고 저쪽으로 더 가시라고 하는데 수원행 버스가 막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발작처럼 문득 '수원'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콱 박혔다.
수원에 누가 살던가...
얼마 전에 만났던 사촌 언니가 수원에 산다는게 떠올랐고, 어느 일요일 훌쩍 찾아가겠노라는 약속을 했던 게 떠올랐다.
갑자기 수원이라는 델 가고 싶었다.
그건 사촌언니와 약속 때문은 물론 아니다.
나는 그저 낯선 동네를 문득 가고 싶었을 뿐이다.
아마 그게 수원이어도 상관 없을 거였고, 부천이래도 상관 없었을 것이고 상주나 전라도 장흥이나 목포래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그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낯선 동네를 널럴하이 코스가 긴 시외버스를 타고 달려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나는 한 번도 수원엘 가 본 적이 없다. 그걸 생각하면서 나는 안 가본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봤다. 지명을 모르는 곳이 많으니까 당연히 떠오르는 곳은 없었지만 얼마나 많은 동네가 세상에 존재하겠는가.
우선 전철 4호선 끝동네인 오이도라는데도 안 가봤고, 경기도 어디쯤인지 원촌이란 동네고 가 본적 없다. 인천 앞 바다도 못 봤다. 그렇게 멍청하게 서서 이름은 들어봤으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들을 꼽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
지구상에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얼만큼 만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걸까? 그리고 우리가 발딛고 있는 이 지구를 얼마나 밟아보고 죽는 것일까??
발 밑에서 낙엽들이 휘휘 감겼던가...
정류장엔 나 혼자 뿐이었다.
2
지나고 생각해 보니 작년 이맘 때 쯤부터 나는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아주 나쁜 상황들이 이어졌었다.
아홉수도 아니었고 삼재도 아니었고 그저 마흔 문턱을 넘어섰던 한 해였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이 엉킨 실타래 같았는지는 모르겠다.
때때로 많은 것에서 사람들은 의지의 중요성에 대해 여러가지 금언들을 만들어낸다. 그것들은 물론 옳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 훨씬 많고 인간은 누가 뭐래도 그것에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체험으로 안다.
그리하여 나는 운명론자다.
그러나 어떤 운명인지 알 수 없는게 산다는 것의 묘미일 것이고, 설사 안다고 해도 어찌하랴......
그게 시지프스가 굴러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한없이 한없이 바위를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올리는 것과 같은 것을...
3
나는 다시 황진이를 읽는다.
일요일의 공기 무게와 질감과 부피감이 다르듯 문장이 주는 울림의 부피감과 질감과 거기에서 오는 감정의 색깔 농담도 나이에 따라 다르다.
4
며칠동안 배탈이 났었다.
특별히 수상한 것을 먹은 기억은 없는데 한 사흘 쯤 복부 팽만감에 시달려서 왼갖 공포스런 병명들이 머릿속을 떠돌았었다.
그렇게 배탈 나기전 꾼 꿈.
누군가 31 아이스크림을 큰 통에 사왔다. 그게 녹차 아이스크림이었던가... 어쨌거나 그런데 그것이 질펀히 녹아 있어서 푸르댕댕하고 멀건 죽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어쩌자구 나는 투덜거리면서 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러면서 말했었다. 베지터리언 아이스크림이라 이지경이군....
여기서 놀라운 건 베지터리언 이란 말이다. 베지터리언은 물론 채식주의자란 뜻이다. 웃기는 것 생뚱맞게 꿈속에서 그걸 내귀에 들리도록 선명하게 중얼거렸다는 것이다. 내가 무신 대단하게 영어를 잘 하는 인간도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날 낮부터 배지터지게-??- 고통스러웠었다.
때때로 꿈이 주는 메타포는 소름이 돋는다. ㅋㅋ.
5
오늘... 모처럼 시골엘 갑니다.
김장을 하신 울엄니... 택배로 부쳐주랴?.... 하셨습니다.
그러다 문득,
대체 마흔 넘은 인간이 칠십 넘은 노인네 구부정한 허리로 담은 김치를 받아 먹으며 희희낙락한다는 것에 대해 갑자기 심상찮게 마음이 쓰렸습니다.
내가 칠십이믄 어떤 기운으로 살아가게 될까도 생각해 보고, 울엄니는 내 나이 쯤 다섯이나 되는 알라들 멕이느라 동분서주 하셨을 터인데 당최 나란 인간은 사지 육신 멀쩡해갖고 제몸 하나 먹이는 것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울엄니...
지난번 김치 진짜 맛있었어유... 하는 한 마디에
그려??
당장 목소리 무게가 달라지십니다.
다 늙은 딸이 처량맞게 당신이 해 주시는 김치나 얻어먹고 앉아 있는데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는 한마디는 울엄니의 기쁨인 모양입니다.
엄니가 해준 콩가루 먹고 머리칼 엄청 났어유~~
그려?
그리고 그거 이번에 다시 만들고 계시답니다.
자식 낳아 보지 않은 나는 당연히 울엄니 맘이 어떤지 그 무게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럼 자식 있는 사람들은 그럼 잘 알겠지요?
내가 극복할 수 없는 열등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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