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하루는 길고, 인생은 짧다!!

오애도 2001. 11. 19. 00:26
옛날 학교 다닐 때 이상하게 일요일이면 일찍 일어나 엄마의 눈총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몹쓸-?- 버릇을 아직까지 못 버리고 여전히 일요일이면 일찍 일어나 보통 땐 일부러 보려고 애써도 절대 못보는 일곱시 대의 TV프로그램을 다 봅니다.
그러니 일요일은 유난히 하루가 길 수 밖에요.^^

잠정적인 실업자인지라-다음 달 초 까지- 거의 매일 빈둥거리는 날건달인데도 일요일엔 영 분위기가 다릅니다.
마치 종류가 다르고, 무게가 다르고, 샊깔이 다른 공기가 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방 구석에 쭈그려 있어도 말입니다.

해 놓은 밥이 하나도 없어서 모처럼 따뜻한 밥을 짓고, 청국장을 끓이고, 냉동으로 된 동그랑땡도 부쳐 아침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빨래를 해 널고, 빨래 널러 나갔다가 아랫층 주인 아줌씨가 올라와 십분 쯤 수다 떨고, 따라 내려가 누룽지를 얻어 오고, 그리고는 커피를 타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꽤 오랫동안 읽고 있던 쥐스킨트의 '향수'를 다 읽어 치웠고, -갑자기 끝에서 이상해지는 바람에 기분이나빴음- 얼마 전에 읽은 김훈의 '칼의 노래' 에서 마음이 닿는 부분을 다시 찾아 읽었습니다. 그 책은 마치 칼의 노래로 들려주는 아름다운 문장의 노랫가락이 바람이 되어 일렁이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써놓고 보니 이상한 말이네-
어쨋거나 정말 오랫만에 가슴에 바람이 일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그리고 되도 않는 소설의-???-원고를 50매쯤 썼고, 지난 주 배운 영어 문장의 유용한 표현 네 개를 외웠습니다.
홈쇼핑 카다로그를 꼼꼼히 읽고, TV 홈쇼핑 을 보다가 아뿔사 충동구매로 오리털 파카를 샀습니다. 쌉니다, 싸요에 넘어가서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한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
상자 속에 잘 넣어두었던 퀼트 작품을 꺼내 벽에 걸거나 선반에 얹거나 했습니다. 지금 내 방은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입니다.
긴 수염을 늘어뜨린 산타클로스가 쌍으로 벽에 걸렸고, 트리 모양 벽걸이가 세 개, 세워 놓는 트리가 하나, 그리고 헝겁인형들도 죄다 꺼내 놓았습니다. -거의 무당집 수준입니다^^-
대신 여름내 있던 것은 모두 내려서 집어 넣었구요.
책상 정리를 했고, 발톱을 깍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고, 다섯 개의 귤을 먹었으며 커피 한 잔, 녹차 두 잔을 마셨습니다. 화장실을 총 다섯 번 갔으며, 재채기를 세 번 했습니다.^^ 점심엔 어제 백화점 폐점 직전에 사온 김치전과 감자전을 뎁혀 먹었고, 잘못 걸려온 전화가 한통 있었고, 양치질 두 번, 세수 두 번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녁 늦게 나가서 양재천까지 좀 긴 코스로 한시간 30분 걷고 왔고, 그리고 지금 이걸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많은 일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렇게 주절주절 잔뜩 적었지만 여기에 다 적어지지 않는 시간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의 영속성은 정말 하찮은 부분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시간들을 우린 절대로 다 기억해 내지 못할 것이고, 또한 다 느끼지 못한 채로 흘러가 버리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시답잖은 짓을 함으로써, 잠깐 늦가을 혹은 초겨울의 하루를 잡아놓고 싶었습니다.

결국 이런 날들이 모이고 모여 삶을 이루는 것이고, 지나고 나면 그것은 기억속에서 언제나처럼 순간으로 머물겠지요.
아니면 순간조차 기억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삼백 예순 다섯 날 중에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날은 몇 날이나 될까요?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고, 현재는 후다닥 지나가고, 미래는 주춤주춤 다가온다고 합니다.
나는 그 속에서 어떤 걸음으로 걷고 있는지......
여기 썼던 '오늘'도 이미 과거가 돼 버렸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