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오늘...
백혈병 진단을 받았던 날.
생전 처음 했던 아르바이트 마치고 밤 열한 시 넘어 집에 돌아와 혈뇨를 보고 택시 타고 영동 세브란스 응급실로 갔었다.
전날 병원 갔을 때 백혈병일 수도 있다는 얘길 들었고 그날 낮에 혈소판 수혈하러 오라는 얘길 듣고 다음 날 가겠다고 해놓고 외출하기 위해 샤워를 하면서 끔찍하게 멍든 옆구리와 허벅지를 보며 문득 서글퍼서 꺽꺽 15초 쯤을 머리 위로 물을 맞으며 울었다.
그게 진단 받고 난 후 '내 삶에 대한 연민'으로 울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울음이기도 했다.
살면서 나는 한번도 내 삶에 대해 연민하지 않았다. 누구 탓을 해 본 적도 없었고 일상에 투덜거리거나 쓸데없이 분노가 많은 인간도 아니었다.
엄니 보내고 딱 1년이 되는 즈음이었다.
엄니랑 지내면서 가끔... 엄니, 엄니 가시믄 나 너무 오래 살게 하지 마요. 몸이 달그락거리고 정신이 길을 잃을 때까지 살지 않게 해줘요. 난 나같은 딸도 없어서 몸 맡길 데도 읎잖어요... 했었다.
처음 입원하고 불쑥불쑥, 울엄니 능력 있으시네. 이렇게 금방 소원을 들어주시니...저승에서는 오랫동안 수련을 해야 능력이 생기는 거인디... 하는 웃기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것도 다 하늘의 섭리고 뜻이 있으려니... 생각하기까지는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혼자서 한 응급실 입원이라 준비가 전혀 없었던 탓에, 이틀 후 혈소판 낮아서 병원 나가는 건 안된다는 담당의와 싸워서 몇시간 집엘 다니러 왔었다.
고양이 밥을 잔뜩 주고 고양이 화장실 청소도 해 놓고 빌려온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이것저것 챙겨서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어쩌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집을 좀 더 정리할 걸 그랬나...
똘똘이는 어쩌나...
주위 사람들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은데...
힘들지 않게 갔으면 좋겠는 걸 ...
엄니 안 계셔서 다행이구나...
그 택시 안에서의 상념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코앞으로 불쑥 예고도 없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절절하게 실감했던 그 10분도 안 걸렸던 병원으로의 귀환길.
그리고 일년이 지났다.
창밖은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이고 있고 나는 오늘 작년 같은 날 갔던 친구네 가게로 아르바이트를 갈 것이다.
죽음이 문득 다가오듯이 삶도 문득 그 앞자락을 펼치며 다가오기도 한다.
작년 오늘 이후... 내 삶은 혹은 내 영혼은 한없이 가벼워졌다.
그 영혼의 가벼움은 나머지 삶의 자유로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어떤 것이든 시작하거나 시도할 수 있고 동시에 아무것도 안 해도 되거나 하고 싶지 않아도 되는 자유...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
책으로 배울 수 없는 것.
짐작으로 아는체 할 수 없는 것.
오로지 경험에 의한 깨달음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신의 선물이자 삶의 축복이다.
하여 축하하고 싶은 일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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