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심야에 먹는 시퍼런 무우 맛!!

오애도 2002. 2. 2. 04:17
엊그제 백화점엘 들렸다가 커다랗고 시퍼런 무우 한 개를 사 왔습니다.
도대체 이 겨울에 밭에서 막 뽑아온 듯한 싱싱함을 어떻게 유지하는지 정말 신기한 생각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옆에서 팔리고 있는 한 팩 오천원하는 딸기보다 더 생경한 싱싱함이었습니다.

어쨋거나, 넉넉한 엉덩이를 가진 오십대 아줌마가 철퍼덕 앉아 있으면 그렇게 안정적이고 실한 모습일까요?
무우는 밑쪽이 둥글 넓쩍 한데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지만 그렇다고 가느다라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튼실하게 굵은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맛있는 조선무우의 형상이었습니다. 게다가 위에서부터 삼분의 이가 이 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초록이었습니다.
어릴 적 텃밭에서 뽑은 무우들이라는 것은 그렇게 실한 것 보다는 그저 어른 주먹보다 조금 큰 것들이 대부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수확한 무우는 김장을 하고 남으면 땅에 묻었습니다. 구덩이를 파고, 무우를 넣고, 짚을 덮고, 다시 흙으로 자그맣게 봉분 모양으로 덮은 다음 겨우내 꺼내 먹는 것이지요.
그걸 양은 솥에다 척척 삐져 넣어 들기름에 달달 볶아 솔가지를 때서 무우국 끓이면 최고의 맛이지요.-엥, 또 먹는 얘기다!!-
오죽하면 그냥 깍아먹어도 맛있겠다 하는 생각으로 덜렁 사 버렸겠습니까?
어쨋거나 그 무거운 무우를 사들고 오고는 이틀동안 차가운 부엌 바닥에 팽개쳤다가 갑자기 무엇에 씌인듯 지금 이시간-새벽 두시가 넘었음-에 와샥거리며 먹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긴 겨울 밤 간식이라야 날고구마 깍아 먹는 것이 전부였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일찌감치 떨어져 한 겨울까지 남아 있는 경우도 드물었습니다. 음, 국사시간에 배운 것이 지금 막 생각났는데 그게 아마 구황작물이라지요? 그리고 치명적인 문제가 보관성이 떨어진다... 하긴 고구마처럼 쉽게 얼거나 썩는 것도 드물 것입니다.
날씨가 조금만 추우면 불기 안가는 윗방에 만들어놓은 고구마광에서는 썩은 고구마가 물을 줄줄 흘렸으니까요.

그게 떨어지면 할머니께서 고구마하고 맛이 같다고 우기시며 무우를 깍아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도 고구마하고 비슷하지는 않았지만, 그 아릿한 맛 다음에 오는 겨울무우의 들큰함은 입안에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먹고 자면 뱃속에서는 전쟁이...^^;;
각설하고 지금 먹는 무우는 그때 먹던 고구마나 무우맛처럼 맨숭하던 입에 황홀한 기쁨을 주진 못하지만 그래도 뭔가 순수한 맛을 느끼게는 해 주는 듯 합니다.

옛날엔... 혹은 옛 것은... 하면서 그때가 그리운 시절이라는 둥 할만큼 나일 먹은 것은 아니라고 우기지만 결국 별 수 없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오래 전의 것들이 손을 당기고, 입을 당기고, 마음을 당기는 것을 보면 나일 먹은게 확실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어렵고 힘들었던 오래전 날들을 되살리는데 단 돈 이천원도 들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를 해야할지 씁쓸해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세상은 어떤 것은 너무 쉬워져서 사는 것도 만만해-??- 보입니다.

그런 만만한-??- 세상을 난 왜이렇게 만만찮게 살고 있는지...

무우 한 조각을 어석거리며 해 보는 생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