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나는 지상이 좋다!!

오애도 2002. 1. 6. 02:19
초등학생 조카 셋이 왔었습니다.
첫날은 너무 추워서 집안에서 종일 보냈습니다. 나가고 싶어 주리를 틀었지만 비디오 빌리러 나갔다가 맛배기로 본 추위에 모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다음 날은 추위가 누그러진 탓에 영화관에 가서 해리포터를 봤고 다음엔 아쿠아리움인지 뭔지 하는 곳엘 가서 멀미나게 물고기를 봤습니다.
밥상 위의 물고기전을 하고 있더군요.
우리가 언제나 먹을 수 있는 명태-생태, 동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 황태-며 멸치, 대구, 아나고, 아귀, 쥐치 같은 생선들이 그야말로 살아서 어항에 갇혀 우아하게-?-유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부터 나는, 혹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물고기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푸르고 깊고 어두운 바닷속이거나, 아무도 없고 누구도 모르는 조용한 산 속의 맑은 계곡물에서 헤엄치며 사는 물고기 말입니다. 그렇게 살면 물고기에게 생각이나 마음이 있거나 말거나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두 항아리나 세 항아리 정도 되는 바닷물 속에서, 혹은 바닷물과 똑같은 성분을 하고 있으면서 자신이 가두고 있는 물고기에게 최적의 환경으로 바다인 체 하고 있는 거대한 인공의 수족관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보면서, 갑자기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밖에서는 엄동설한의 눈보라가 치거나 말거나, 십 미터 넘게 파 놓은 땅 밑에서는 흥건한 먹자거리와 후끈한 열기와 첨단의 시설로 움직이는 물고기의 감옥과 그것들을 향유하러 온 사람들로 왁자했습니다.
나는, 혹은 우리는 그렇게 편안하고 편리한 것에 길들여지고 사육되는 것은 아닌지...

다음에 간 곳은 롯데월드였습니다.
야간에 입장을 한 탓에 그나마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혹시 3층의 바위인체 하고 있는 곳에서 그 꼭대기를 올려다 본 적이 있는지...
멀리 집이 한 채 서 있고 천장-하늘인 체 하고 있는-의 한 쪽은 노을 빛이고 그 반대쪽은 어스름한 회색빛이었습니다. 그 밑으로 공룡 모형들이 서 있습니다.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밖에는 이미 열시가 넘은 한 밤중인데 우린 이렇게 불야성 속에서 살고 있구나.

좀 전에 티비에서 트루먼쇼를 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트루먼이 다다른 수평선이 알고 보니 푸른 하늘을 그린 벽이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엊저녁에 본 그 천장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만약에 아이들을 그런 인공의 하늘 밑에 키운다면 그들도 그것이 하늘인 줄 알겠지요?
그러나 그곳에선 여기가 안이냐 밖이냐 하는 것에 신경쓰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듯 했습니다.

나는 지하철을 안 좋아합니다. 그래서 좀 멀거나 시간이 걸려도 버스를 타고 가는 편이지요. 그런데, 세상은 점점 땅속으로 생활의 영역을 넓혀갑니다.
언젠간 지상의 모든 것이 피폐해지면 땅속에 들어가 두더지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무슨 투웰브 몽키스에 나오는 미래의 인류처럼 말입니다.

나는 땅속이 싫습니다.
아무리 불을 환히 밝히고,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해도 거기엔 어딘가 곰팡내 나는 어둠의 냄새를 풍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둠이 품고 있는 답답함이 가슴을 누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 어둠의 세상을 지상인 것처럼 꾸며놓은 문명이라는 것이 가끔은 소름끼치게 무섭습니다.

나는 아름다운 지상에서 살고 싶습니다.

종일 지하세계와 실내를 탐험하고 돌아온 날의 단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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