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날이 밝으면......

오애도 2002. 4. 22. 02:26
원래 오늘 새벽에는 부석사엘 가려고 했습니다.

엊 저녁에 실실 보따리를 싸다가 정말로 사과꽃이 피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일 끝나고 돌아와 영주시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사과꽃 소식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홈페이지 관리하는 사람 전화번호가 나와 있길래 전활 했습니다.

"초면에 실례이지만 거기 혹시 사과 꽃이 피었나요?"

친절한 그 담당자는 말했습니다.

"오늘 부석사 쪽엘 안 가봐서 모르겠습니다. 아랫 쪽은 다 피었는데 그 쪽은 서늘한 기운 탓에 아직 안 피었을 것이고 25일 쯤이 만개를 할 겁니다."

"아 예... 그럼 26일 쯤에나 가야겠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낯선 사람과의 통화는 끝났습니다.
전혀 본 적 없는 사람이 불쑥 일요일 밤 열시 넘어 전화를 한 나도 생각해 보니 만만찮은 인간이고, 그런 전화를 친절하고 부드럽게 받아준 상대방도 만만찮은 인물인 듯 합니다.

나일 먹는다는 것은 정말 많은 것에서 뻔뻔해진다는 것을 실감하고 씁쓸해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은 세상이 너무 편리해지고 좋아져서 무섭기까지 합니다.

인간으로써 모양이 갖추어질 때 쯤에 한없이 느꼈던 빈곤 탓인지 이렇게 편안해진 세상에 나는 감사보다는 두려움이 앞섭니다.
편안하다는 것에 길들여진 탓에, 점점 가슴 뛰며 기대하는 것들이 사라져가는 것들을 실감합니다.
모든 것은 즉석에서 해결이 되고 오래 걸리는 것, 기다려야 하는 것, 생각해야 하는 것들은 점점 그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무엇을 아쉬워하고 무엇을 감사해 하고 무엇을 귀하게 생각하게 될지...

이렇게 무엇이건 넘쳐나는 시대를 살면서 가끔 한없이 부족하고 아쉬운 것 투성이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던 그 때에 비해 나는 정말 행복한 것일까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면 가슴 저 아랫쪽이 알싸하니 아파 옵니다. 아마 이젠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쓸쓸한 자각 때문이겠지요.

아직 피지 않은 사과꽃 얘기를 들으면서 별 생각을 다 해 봅니다.



사족: 사과 꽃이 피었거나 말거나 날이 밝으면 훌쩍 어딘가엘 다녀올 생각입니다.

모두들 잠든 새벽에 나는 배낭을 메고 고속버스 터미널을 향해 도둑처럼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