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 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 여름 내 그는 죽만 먹었다. 올해엔 김장을 조금 덜 해도 되겠구나. 어머니는 남폿불 아래에서 수건을 쓰시면서 말했다. 이젠 그 얘긴 그만하세요, 어머니. 쌓아 둔 이불에 등을 기댄 채 누이가 소릴 질렀다. 그런데 올 해에는 무우들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많이 들었을까. 나는 공책을 덮고 어머니를 바라 보았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풍병에 좋다는 약은 다 써 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 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
2
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 줌 집어 던지며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 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 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여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아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 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 봄엔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가득 칼국수를 퍼 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
3
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츄리닝을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츄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뎅이가 묻어 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작은 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깎던 감자가 툭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진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 키우셨다. 땅도 한 뙈기 장만하셨댔었다. 작은 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이 스웨터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러나 그때 아버지는 채소 씨앗 대신 알약을 뿌리고 계셨던 거예요.
4
지나간 날들을 생각해보면 무엇 하겠느냐. 묵은 밭에서 작년에 캐다 만 감자 몇 알 줍는 격이지. 그것도 대개는 썩어 있단다. 아버지는 삽질을 멈추고 채마밭 속에 발목을 묻은 채 짧은 담배를 태셨다. 올해는 무엇을 심으시겠어요? 뿌리가 질기고 열매를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심을 작정이다. 하늘에는 벌써 티밥 같은 별이 떴다. 어머니가 그만 씻으시래요. 다음날 무엇을 보여주려고 나팔꽃들은 저렇게 오므라들어 잠을 잘까. 아버지는 흙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셨다. 봐라. 나는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심으시려고.
5
선생님. 가정방문은 가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그래도 너는 반장인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 방과 후 긴 방죽을 따라 걸어오면서 나는 몇 번이고 책가방 속의 월말고사 상장을 생각했다. 둑방에는 패랭이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이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그날 밤 늦게 작은누이가 돌아왔다. 아버진 좀 어떠시니. 누이의 몸에서 석유냄새가 났다. 글쎄, 자전거도 타지 않구 책가방을 든 채 백 장을 돌리겠다는 말이야? 창문을 열자 어둠 속에서 바람에 불려 몇 그루 미루나무가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6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내렸다. 아버지, 여전히 말씀도 못하시고 굳은 혀. 어느 만큼 눈이 녹아야 흐르실는지. 털실뭉치를 감으며 어머니가 말했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신다. 언제가 봄이예요. 우리 모두 낫는 날이 봄이예요.? 그러나 썰매를 타다보면 빙판 밑으로 푸른 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얼음장 위에서도 종이가 다 탈 때까지 네모 반듯한 불은 꺼지지 않았다. 아주 추운 밤이면 나는 이불 속에서 해바라기 씨앗처럼 동그랗게 잠을 잤다. 어머니 아주 큰 꽃을 보여드릴까요? 열매를 위해서 이파리 몇 개 쯤은 스스로 부숴뜨리는 법을 배웠어요. 아버지의 꽂 모종을요. 보세요 어머니. 제일 긴 밤 뒤에 찾아 오는 우리들의 환한 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
내가 좋아하는 기형도의 시입니다.
그의 다른 시들이 다분히 추상적이고 난해한 터라 사실 그리 큰 감흥을 갖고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 시는 아주 잘 그려진 한편의 묘사화같습니다. 무심한 듯 보이지만 구석구석 배치된 절묘한 시어들은 소름끼치게 섬세한 내러티브 구조를 갖고 있지요. 하지만 그 내러티브는 어떤 감정이나 사건의 기복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명 가난으로 가라앉은 그 시대의 평범한 가정의 일상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진 그 해 겨울 무우들마다 바람은 숭숭 들고, 어린 '나'의 잠바에도 구멍이 숭숭 나 있지요. 바람이 든 무우와 구멍난 잠바... 병든 아버지...그리고 구멍난 가정 혹은 家系
하여 어머니가 말하는 올겨울을 넘기는 건 잠바가 아니라 아버지일 것이고 그렇게 이 시는 불확실한 희망으로 시작합니다.
양계장에서 닭을 키우는 아버지 머리 위로 병든 아버지처럼 노랗게 곪아서 달은 떠오르고, 너희에게 모이를 주기 위해 닭을 키우는 아버지를 향해 화자는 나는 이제 병아리가 아니라고 말을 하지요. 오므라들어 잠을 자는 나팔꽃을 보며 품었던 의문은 마지막에 해바라기처럼 동그랗게 잠을 자는 모습으로 답을 냅니다. 아침에 잠깐 피는 나팔꽃이 아니라 크고 희망적인 해바라기 꽃인 것은 아마 병아리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꽃 모종은 희망을 품고 열매를 위해 꽃잎 몇개를 스스로 부숴뜨릴 수 있을 만큼 큰 해바라기꽃이 된 것입니다.
오래 씹을 수 있는 오징어를 먹고 싶어하는 누이의 빈 도시락 속에서 스푼이 내는 음악소리는 고픈 배에서 나는 소리의 놀라운 형상화일 것입니다.
내년 봄엔 너도 야간 고등학교라도 가야한다 어머니는 말합니다. 누이는 또 말하지요.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그렇게 콩나물처럼 음지와 어둠 속에서 물만 먹으며 아이들은 어쩌면 밑으로 밑으로만 자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누이는 다음날 온 몸에 석유냄새를 풍기며 희망처럼 신문을 돌리고 옵니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까.
그리고 작은 누이는 말합니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잘라내야 한다는 타버린 심지 뒤에 오는 병든 아버지에 대한 누이의 서술은 참으로 놀라우리만치 섬뜩하고 절묘한 시어의 배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그 어둡고 낮게 가라앉아 있는 풍경에서 놀라운 희망의 정서를 튕겨 오르게 합니다.
그것은 시의 맨 마지막에 도약때문입니다. 아주 긴 밤 뒤에 찾아오는 불빛불빛불빛 이라는 행을 가만이 읊조리면 정말 환희롭게도 용수철처럼 가슴 저 밑마닥에서 희망이 떠오릅니다. 불빛이라는 낱말이 주는 관습적 상징에서 오는 이미지가 이렇게 놀라우리만치 선명한 정서를 환기시키는 경우도 드물 것입니다.
하여 불확실한 희망으로 시작된 시는 확실한 희망으로 결말을 짓습니다.
압축과 절제가 긴 서술과 묘사보다 몇 십배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며 농도 짙은 정서을 환기합니다. 때로 침묵이 웅변보다 수 백 배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처럼...
그리고 이 시에는 내 기억과 가슴 속에 판화처럼 새겨져 있는 내 유년의 풍경들을 볼 수 있습니다. 고춧가루를 친 칼국수나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이나 패랭이 꽃처럼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자는 것이나 종이배를 만들어 띄울 수 밖에 없는 월말고사 상장이나 수건을 고쳐 매시는 어머니나 어둠 속에서 거대한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미루나무나 검댕이가 묻어 나오는 등잔불이나 고등학교 대신 공장에 다니는 누이들이나 오므라들어 잠을 자는 나팔꽃을 보며 떠오른 생각이나 병든 아버지를 향해 아프시기 전에도 해 놓은 일 없다고 말하는 작은누이의 서술 같은 것.
들여다보면 가슴과 눈가가 축축하게 젖을만큼 습기를 형성하는 풍경들입니다.
그렇게 내 어린날이 가장 긴 밤의 동짓날 밤이면 그렇게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푸른-얼마나 희망적인 색깔인가- 물이 얼음을 녹이고 넓고 큰 바다로 흘러 나는, 살. 아. 가. 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요즘 혼자 산에 다니며 어쩐 일인지 자꾸 떠오르는 싯구...
봐라 난 이렇게 쉽게 뽑혀지는구나. 그러나 아버지. 더 좋은 땅에 당신을 옮겨 심으시려고.
내게도 더 좋은 땅이 있겠지요... 그렇게 시는 희망을 노래합니다. 지금 어둠과 그늘 속에 있다면 한 번 희망의 노랠 들어보세요. 행간과 자간에서 울리는 희망의 노래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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