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부석사... 떠있는 돌. 그리고 부유(浮遊)하는 여인 2

오애도 2001. 10. 7. 01:27
밤이 떨어지는 소리에 자동 인형처럼 고개가 돌아가고, 그 다음에 몸이 그곳을 향해 자동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우선 그 투둑 하는 소리가 너무나 감동적이었고, 붉은 색의 밤이 풀숲에 떨어져 있는 모습은 사랑스러움 그대로였습니다. -이 사랑스러움이란 표현은 바로 우리 엄니의 표현입니다. 엄마는 풀숲에 떨어져 있는 도토리나 깨끗한 곳에 솟아 있는 돌미나리, 달래 그런 것을 보고 사랑스럽다는 표현을 하신답니다-
그리하여 나는 본격적으로 밤줍기에 나섰습니다.
산에서 자라는 토종 밤나무인지라 밤은 도토리보다 조금 큰 크기였습니다. 에고 귀여운 것들....
그렇게 한동안 주운 밤을 호도빵 담아간 봉지에 담았더니, 오잉! 석 되쯤은 족히 되더만요.
다 줍고는 수세미가 된 머리칼을 정리하고 흐르는 땀을 씻고 내려오니 절은 더 텅 비어 있었습니다.
배낭 벗어 밖에 놓고 화장실에 다녀와도 그놈은 그자리에서 얌전히 날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야말로 절간처럼 조용한 절. 참으로 조용할 때 왜 절간처럼 조용하다고 표현하는지를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멀리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먼 산을 바라보며 성질 더러운-?- 나는 친구들에게 여긴 절간처럼-?- 조용하다고 문자 메세지를 보냈습니다.^^
잠시 후 열받아서 씩씩대는 분위기가 얹힌 답장 메세지가 오더만요. -남의 약오름은 나의 기쁨^^;;-
그 조용한 절간의 돌로 만든 의자에, 잠시 세상을 잊은 듯 앉아 있었습니다.
머리는 텅 빈 듯하고 눈과 귀는 열려있었지만 열려있지 않은 것과 같이 어떤 새로운 풍경이나 소리를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마치 극적인 영화 장면에서 소리를 완전히 죽인 채 정지된 화면처럼 말이지요. -에고 설명 불가!!-
그렇게 아무도 없을 수가 있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 할 정도로 한동안 너무나 조용하고 너무나 적막했습니다.

지난 봄에 경주엘 갔을 때도 그랬습니다.
3월 말일이었는데 서울서 떠날 때는 때늦은 함박눈이 그야말로 펑펑 쏟아져 사람을 놀래키더니 경주 시내는 벚꽃이 활짝 펴 있더군요. 그런데 그 다음날 불국사엘 갔는데 또 눈이 푸슬푸슬 내렸습니다.
불국사 밖에는 터질 듯이 꽃망울이 부풀어 있었는데 그 위에 쌓이는 눈이라니...
어찌어찌하다가 석굴암 올라가는 버스를 놓쳐 거기까지 산길을 따라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길가에서 커피 파는 아줌마 말로는 빨리 가면 삼십분이라고 했는데 웬걸! 걸어도 걸어도 석굴암은 안 나오더군요.
그런데 그 석굴암까지 가는 한 시간 남짓,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는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신비한 조용함과 고요함이었습니다.
누구하나 그 사십여분 동안 숲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눈은 내려 숲속의 나뭇가지 위에 쌓이고 있었고, 올라갈수록 산 안개까지 내려와 자못 신비로운 분위기가 감돌기까지 했는데 너무 조용하니까 으스스하고 푸스스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세상 같지 않았던 적막과 고요함, 그곳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나 하나, 가끔 너무 섬뜩해서 그 자리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기까지 했던 그 고즈넉하고 신비롭게 멈춰져 있던 숲속의 나무들...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길 안내를 하듯이 내 앞에서 앉았다 날았다를 했습니다.
안녕, 너 되게 이쁘구나!
하고 큰소리로 말을 걸어 보았습니다. 새는 날아가지도 앉고 앞에서 고개짓을 해 보였습니다. 나는 좀 으스스 해지면 나지막히 노래까지 불렀습니다. 이것 역시 더 이상 설명 불가능 하군요.
그렇게 석굴암 밑의 광장까지 올라갔습니다. 다다라보니 관광버스들이 잔뜩 서 있더군요.
그때 깨달은 것. 우리나라 사람들 너무 편하게 여행하려고 한다는 사실...
나는 아무나 붙들고 내려갈 때만이라도 걸어내려가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어쨋거나 그때 내가 한 그 숲 속의 경험은 평생 못 잊을 것입니다.

다시 부석사로 돌아와서-에그 삼천포가 특기입니다-
그렇게 넋을 놓고 앉아 있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포르르 왔다가는 날 보더니 얼른 달아났습니다.
아그야 밤주께, 이리와...
흰소리 말라는 듯 다람쥐는 나무에 올라가 버리더만요.
여행의 좋은 점... 가끔 나사 하나 빠진 듯 실없는 행동을 해도 별로 쑥스럽지 않다는 것!!

각설하고 주운 밤을 배낭에 넣고 어깨에 메었더니 음 역시 묵직하더군요. 그래도 왠지 본전 뽑았다는 흐뭇함으로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내려오다가 입구 쯤에서 이천원에 아홉 개나 주는 사과를 한 바구니 샀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정류장 앞의 가게에서 캔커피를 하나 사서 파라솔 밑의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그냥 앉으면 눈치보이니까- 가지고 간 호두 빵을 아구아구 뜯어먹었습니다. 수돗물도 잠시 빌려 사과 하나를 씻어 와삭거리며 먹었구요. - 이 왕성한 식욕- 그 달콤하고 신선한 과육과 과즙이라니... 분명 제대로 딴 것이 아닌 낙과임이 분명한 흠집 투성이었는데도 정말 기막힌 맛이었습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예의 그 앞자리에 앉아 기사 아저씨와 노닥노닥 말을 주고 받으며 소수서원까지 갔습니다.
택시를 대절해도 그처럼 여유있게 움직이지는 않을 만큼 느릿느릿한 시골 노인들...
"어데 가시는데여?"
다섯 번 물으니까 겨우 행선지 말하는 할아버지...
"어르신네요, 그쪽으로 가실라믄 내려서 다음 차 타이소. 이차 한참 돌아 갑니더".
다시 슬로우 모션으로 내려가는 할아버지,
"마 살펴 가시소"
내려서 느릿느릿 손 흔드는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부르릉!!
"하이고 아저씨 성질 좋으시네요, 서울서는 그랬으면 난리가 났을 겁니다"
"다 아는 양반들인데 우짜겠습니꺼"
우린 언제부터 빨리빨리 민족이 됐는지...
다시 옆길로 새는 얘기...
또 몇 해 전에 유럽 여행에서 로마의 트레비 분수앞의 흑인 노점상들이 빨리빨리를 부르짖고 있어서 놀랐었거든요. 한국말로...
퍽퍽!! 다시 제자리로 와서, 어쨋거나 소수서원엘 도착했는데, 그곳 역시 고즈넉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정말 날 하나는 제대로 잡지 않았나 싶습니다. 바로 내가 원하는 분위기였으니까요.
역시 안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고, 나는 설렁설렁 사과를 아사삭거리며 돌아 다녔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흙 마당에 떨어진 철이른 낙엽들을 몰고 다녔습니다.
소수서원의 내력이나 그런 것은 안 쓰겠습니다. 그건 가셔서 안내문 보면 다 나와 있으니까...
공사를 하는 바람에 죽계천 물이 흙탕물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밑이 다 보일만큼 맑은 물이라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같았습니다. 아무리 봐도 고여 있다가 상한 물처럼 보였거든요.
사람이건 물이건 지나치게 고여 있으면 상하는 법. 어쩌면 나는 고여 있는 물은 아닐까?

텅 빈 주차장을 지나 버스 정류장에 가 앉았습니다.
여행을 가장 여행스럽다고 느낄 때가 내 경우에는 낯선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입니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있으면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 합니다.
잠시 후 짐을 잔뜩 든 아주머니 두 분과 나란히 앉아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여기 원래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하이고 무신 그런 말을... 아까까지도 버스가 몇 대씩 와 있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부시럭 부시럭 오징어를 꺼낸 아줌씨, 극구 사양하는데도 먹으라며 주시는데 에고, 체면상 거절이 아니라 턱이 빠져 질긴 것을 못 먹는단 말이어요. -_-;; 그래도 우짜겠습니까? 잘먹겠습니다 하고 받아서 틀니 한 할머니 총각무우 우물 거리듯 우물거렸습니다.
맛있는데요... 어쩌구 하는 접대성 멘트까지 하면서...
차비 비싸다고 차 한 대를 그냥 보내고 -아주머니들이 말려서- 다음 차를 타고 터미널까지 와서 서울 오는 차를 탔습니다.
그렇게 浮遊하며 보낸 나의 짧은 여행은 끝났습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나 -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하는 제목두 있더만...- 신경숙의 이상문학상 수상작 '부석사'탓에 사람들 드글거릴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너무나 조용하고 고즈넉해서 그야말로 내가 원하는 여행 색깔을 만든 탓에 참으로 기뻤습니다. 어쨋거나 지나치게 닳고 닳아서 시장 바닥처럼 된 곳은 정말 질색이니까요.

우리가 절을 찾아 가는 이유는 아마 그 조용함과 고요함을 느끼러 가는 게 아닐까요?

아직은 조용히 수줍은 모습으로 부석사는 그렇게 떠 있었습니다. 내 마음속에...

하지만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달고 달았던 바람과 뭉글거리던 구름과 그것을 뚫고 나오던 빛나는 햇빛과 조금씩 탈색되어가는 미묘한 산의 색깔과 그곳에서 만났던 순박한 사람들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애정의 무게와 내가 이세상에 나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는 것을 짧은 필설로 말입니다.

사족: 주워온 밤은 잘 골라서 학원 갈 때 좀 삶아가고, 집에 갈 때도 한 됫박 가져가서 삶아 먹고, 지금 냉장고에 한 됫박쯤 남아 있습니다. 시장에서 살 수 있는 알 굵은 놈보다 서른 배쯤 맛있습니다. 역시 토종이 최고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