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졌던 처음 냉장고는 50리터쯤 하는 음료수 전용 냉장고를 친구가 시집 가면서 물려준 것이었다. 작은 플래스틱 김치통이랑 작은 음료수 몇개 들어가면 꽉 차는 것이었는데 원 도어에 그나마 냉동부분도 있었다. 하여 조금 윗쪽으로 과일이나 야채라도 올려놓을라치면 졸지에 냉동 과일이나 야채가 됐다. 하지만 단칸방에 별로 사다 쟁여놓을만큼 넉넉한 생활이 아니었던지라 그것만으로도 감지 덕지였다. 냉장고가 작으니까 혹 시골집에서 야채라도 갖고 오면 부랴부랴 해 먹었던 터라 의외로 버리는 것이 거의 없었다.
두번 째 냉장고와의 만남은 첫번 째 냉장고와 같이 살던 셋집에서 -8년을 살았다- 독립된 부엌과 화장실이 있는 작은 집으로 가면서 이루어졌다. 아는 사람한테서 중고 냉장고를 샀는데 250리터쯤으로 기억된다. 한동안 냉장고가 커서 좁은 부엌의 찬장 대용으로 쓰기도 했는데 문제는 이게 너무 낡은 것이었는지 그것은 얼마 안가 냉동실에 성에가 끼면서 한달에 한 번 쯤 부엌칼을 가지고 두터운 얼음덩이를 쿵쿵거리며 제거해야하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어느 날 들들거리며 전혀 냉기가 나오지 않음으로써 최후를 맞고, 지금 쓰고 있는 225리터 짜리 새 냉장고를 샀다. 앞의 냉장고의 소음과 냉동은 전혀 안되면서 성에가 굳어 얼음덩이가 되는 냉장고에 비하면 새 냉장고는 얼마나 산뜻하고 그야말로 쿠울하던지... 어쨌거나 냉동실에 얼음도 얼고 해서 냉커피도 타먹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냉동실에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쌓이면서 얼음 얼릴 공간이 없어져 버렸다. 널럴했던 냉장고는 슬슬 잡동사니로 쌓이기 시작했고 종종 열어보지 않은 야채실에서 검은 봉지에 쌓여 있다가 물이 질컥거리며 상한 야채들이 발견되곤 했다. 게다가 몇 년 전에 야채실 유리 선반이 수박 한 통 올려 놓으려다 쩌억 깨지는 바람에 누런색 박스 테이프로 줄줄 감아 붙여 쓰고 있는 터에-이 때는 A/S를 받아야지 했었다-맨 윗선반마저도 쩌억 반으로 쪼개졌다. 하여 그것은 '취급주의'라고 붉은 색으로 써있는 박스 테이프로 둘둘 감았고,-이때쯤 냉장고를 사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급기야 며칠 전에는 마지막 남은 가운데 선반마저 또 쩌억!!!! 쪼개졌다. 그걸 다시 '취급주의'라고 써있는 흰색 박스 테이프로 감으면서 냉장고를 당장 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여 다섯 명이 한달에 한 번 하는 계가 있는데 곗돈만 타믄 사야지... 하는 터에 엊그제 곗돈은 타고야 말았다. 하긴 탄 것은 아니고 냉장고 사야겠다는 말에 착한 친구들이 양보의 미덕을 발휘한 것이다. ^0^
사야지 결심하고는 그래도 오랫동안 이것저것 둘러보고 검색해 보고 물어보고 했었다. 나란 인간은 원래 좀 밍기적밍기적 하는 인간인터라 결심하고 실천하는데 꽤 시간이 걸리는 인간이다. 처음엔 지금 쓰는 냉장고와 더불어 쓰고-공부하러 오는 아이들 음료수 냉장고로- 좀 적은 용량의 냉장고를 사려고 했었는데 무신 냉장고를 영업집도 아닌데 두 개씩 쓰냐고, 그냥 큰거 사는게 나중에 더 좋을 거라고 하길레 그럼 그래야겠군 하고 500리터를 사기로 정했다. 그러던 차에 또 누군가 양문형 냉장고가 오히려 공간 활용에 더 효율적이라는 말에 그럼 양문형으로 살까?로 마음이 바뀌었다. 하여 양문형 중에 가장 작은 걸로 결심을 했는데 또 이번엔 이왕 사는거 좀 큰게 나중에 후회 안하고 좋을 것 같다는 말에, 것도 그런 것 같아서 제일 적은 용량보다 한 단계 높은 걸로 사고야 말았다. 차암.. 귀도 얇은 인간이다. ㅋㅋㅋ
옛말에 사람과 그릇은 있는대로 쓴다 라는 말이 있다. 냉장고가 커졌으니 뭐 이것 저것 또 채워 넣어지겠지.
그러고 보면 내가 큰 냉장고 사기를 저어한 것은 나중에 좁은 집으로 이사가면 곤란할 것 같아서였는데 누가 듣더니 큰 집으로 이사갈 생각을 해야지 무신 그런 생각을 하냐고 핀잔을 했다. 듣고 보니 과연!! 맞는 말이다. 성장발전할 생각대신 몰락할-??-생각을 하다니...
하여 삼성 지펠SRS-626LCH홈바형 냉장고를 사고 만 것이다.
좋다!!! 난 부자다. 혼자 사는 주제에 초-??-대형 냉장고라니.... 괜히 소박한 인생 업그레이드한 기분이 든다. 후후후
어쨌든 냉장고는 다음주말에나 올 것이고 친구들과는 냉장고 입주기념파티를 계획하고 있다. ㅋㅋ.
각자 냉장고에 채워 넣어야할 물품들을 하나씩 사주겠단다. 계란이며 음료수며 냉장고용 탈취제며...
나는 역시나 지지리 복많은 인간이다. ^0^
하여 또 나는 십년 쯤을 같이 할 말없는 사물친구를 얻은 것이다.
때때로 오래된 사물은 오래 된 친구같다. 묵묵하고 말없는... 그러나 그것들은 종종 너무나 쉽게 버려진다. 그것들에 마음이거나 정신이란 게 있다면 섭섭하겠지? 흠.... 분명 섭섭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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