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백기의 깃봉이 보이는가 싶었던 감기의 끝자락에 그만 된통 당했습니다.
사흘 가까이 목소리가 안 나와 고생 중입니다. 덕분에 대부분의 일을 미루고 되도록이면 안 떠들려고 애쓰며 지냈지요.
하지만 인생이란 게 묘하게 꼬이는 특성이 있는지라 만나자는 사람들은 더 많았고 전화는 쉴 새 없이 왔으며 간신히 나가는 학원에서는 하필 더 떠들어야만 하는 부분에 딱 걸리고 말았습니다.
하여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열심히 세상을 향해 쉼 없이 지껄였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이든가요?
'사랑의 종말'이라는 작품이 있을 겁니다. 아마 남편있는 여자가 주인공인 '나'와 사랑에 빠졌는데 남편은 성실한 공무원이었지요.
남편이 감기에 걸려 목이 쉬었고 그런 남편이 있는 집에서 몰래 그 여인은 정사를 벌입니다.
그 와중에 삐걱 소리에 놀라 나갔을 때 남편은 더운물을 떠가며 쉰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그 책을 누군가 빌려가 돌려주지 않아서 뭐라 말했는지 찾아볼 수 없는 탓에 정확한 걸 알 수는 없지만 잠을 깨워 미안하는 말이었는지 뭐 그런 거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정부와 남편에 대해 얘기를 합니다.
'쉰 목소리로 과부한테 지급해야 할 보조금 건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거라고...'
다소 경멸 섞인 표현이었는데 지금이나 그 때나 성실하고 별 문제 없는 남편이 경멸 받아 마땅했었는지가 의심스러웠었습니다.
하여 지금도 감기가 걸려 목이 쉬면 이상하게 그 문장이 떠오릅니다.
안 나오는 목소리로 과부들에게 줘야하는 정부 보조금 얘기를 한다는...
남편의 쉰 목소리가 문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연구해보지-??-않아서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그녀는 아마 그 착하고 성실한 남편에게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유는 사랑하는 그녀의 정부가 폭격 중에 실종되었는데 하나님께 기도를 했던가 했을 것입니다.
'그를 살려주면 그를 잊겠다고...'
시점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고 서술자는 바로 그녀의 정부인 '나'입니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탓에 가물가물한 내용인데 그린의 소설이 다분히 종교적인 데가 있는 터라 결말을 그렇게 도덕적인 쪽으로 몰고 갔으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것보다 진정으로 사랑한 불륜의 남자를 위해 개과천선을 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은 사실 누구한테나 오는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쓸데없는 얘기가 길어졌는데 다른 기관에 비해 인후와 기관지 계통이 시원찮은 관계로 감기만 걸리면 기침과 목 쉼이 자주 일어나는 나로서는 종종 그 목 쉰 소리와 정부 보조금과 과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후후.
어쨌거나 지금 생각한 건데 그 소설 다시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써 놓고 혹 어딘가 내가 잘못 알고 있는게 있을지도 모를 일이거든요.
하여 아직도 목소리는 영 안 나옵니다.
과부를 위한 정부 보조금 얘기 따위는 아니더라도 고만고만한 알라들한테 교과서 펼쳐놓고 이육사와 시나리오의 구성요소와 삶과 문학이 어쩌구저쩌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말입니다.
때때로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늘 떠들던 내가 되도록 입다물고 있으면 알라들은 괜히 더 불안한지 두리번두리번 자신을 챙기게 되고 눈치를 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 침묵이 주는 불편함이 싫어서 나는 사람들과 있을 때는 그렇게 말을 많이 하게 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말을 안 하고 있을 때의 편안함이 그 스무 배 쯤 더 소중합니다.
아마 그런 연유로 이렇게 '혼자'라는 것에 집착하고 사는 것일 겝니다. 혼자 있을 때의 편안함과 즐거움 중에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당연히 말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구요.
그리하여 말하지 않은 말에도 귀 기울여 같이 침묵할 줄 아는 남자 있으믄 시집갈 생각입니다. ㅋㅋ.
하여 열심히 은행도 볶아 먹고 고정차도 마시고 겨우내 먹던 모과차도 마시고... 온갖 민간요법은 다 해보는 중입니다.
약은??
먹었다가 수업 못할 지경으로 나른해서 혼났습니다.
하여 오늘 아침엔 좀 나아진 것 같은데 모르겠습니다. 이따 저녁에 가서 떠들면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은 아닐지...
하여 즐거운 주말입니다.
행복하시고 건강하십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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