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삶을 다린다!

오애도 2003. 6. 15. 09:39
사람에게는 누구나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기호들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뭐야 저런 걸 왜 좋아하지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각자의 얼굴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처럼 거기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나름의 이유와 정서가 있겠지요.
그런 기호의 하나로 나는 다람질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것도 오로지 한 줄 빳빳이 세워야 하는 바지같은 건 싫고, 셔츠나 손수건 같은 걸 좋아합니다.

그것들은 온통 꾸기작거릴 때 잘 달궈진 다리미판이 한 번 스윽 지나가면 얼마나 반들거리고, 매끈하게 펴지는지요. 그럴 때는 정말 그야말로 삶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집니다.

체형 탓도 있겠지만 나는 잘 생긴 남방셔츠들을 좋아하고 역시나 상의는 대부분 그렇게 질 좋은 남방셔츠들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겨울옷은 대부분 스웨터!!-
색깔만 다르고, 같은 디자인의 것들이 늘 두 세 장이나 많으면 다섯 장씩 되는 것도 있습니다. 더 끔찍한 것은 그 중에 하나가 낡아 해지면-정말 떨어질 때까지 입는다- 똑같은 색깔을 하나 더 사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옷장을 열면 남방 셔츠가 주욱 걸려있는데 그야말로 소확행입니다.

그것들을 깨끗이 세탁한 후에 대 여섯장을 한꺼번에 꼼꼼히 다리는 것입니다. 우선 오른 쪽 몸판, 등판, 왼쪽 몸판, 소매, 맨 마지막으로 깃을 다리는데 가정 교과서에 어떻게 순서가 나와 있건 이건 순전히 내 방식입니다. 그렇게 다림질을 하고 있자면 장인이라 불려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에 정신집중을 하고 있을 때의 풍모가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도 듭니다. ^^;;

그렇게 다려진 것들을 주욱 장롱안에 걸 때의 행복을 아시는지......

오늘 아침 일찍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을 해 놓고 다림질을 했습니다.
짙은 코발트 불루빛 셔츠 한 장, 흰 눈 닮은 백색과 잘 구워진 식빵의 옆구리같은-^^;;-갈색의 옥스포드지 셔츠 두 장, 손수건 세 장.... 남은 열로는 면빤스도-???^^;;-도 다립니다.

어쨌거나 나는 다림질이 좋습니다.
잔뜩 다림질 거리를 쌓아놓고 퍼질러 앉는 그 순간, 뭔지 모를 포만감같은 게 생기거든요. 그것들을 하나하나 다려서 옷걸이에 걸 때는 뭔가 쳐부수어야 하는 생활의 적들을 제거해나가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일상이 꾸깃거린다는 생각이 들거나, 머릿속이 꼬기작 거리거나, 참을 수 없이 마음에 주름이 잡힐 때 다림질을 한 번 해 보시기를......
잠깐이지만 확, 매끈하게, 그리고 날렵하게 삶이 펴진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혹 전생에 세탁소 여주인은 아니었는가 몰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