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서... 2
얘기한대로 대학로엘 다녀왔습니다.
괜히 하는 일도 없이 몽그작몽그작 하다가 저녁 어스름 집을 나섰습니다. 도중에 머리카락을 자른 터라 미용사가 다듬어준 고운 머리를 하고 거기에 안 어울리게 검은색 폴로셔츠에 검은색 진바지 그리고 투박한 등산화를 신고-불 없는 곳에 서 있으면 안보이겠군^^;;- 나는 씩씩했습니다.
혹 대학로에 있을 때 알고 있던, 아니 지금까지 남아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을 떠올려 봤지만 선뜻 생각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여 쾌적한-??-시내버스의 맨 앞자리를 잡고 앉아서 널럴하이 버스가 중앙전용차선을 쌩쌩 달리고 -뭐 한동안 말이 많긴 했지만 중앙버스 전용차선은 그런대로 효율적인듯 ... 여튼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간을 못기다리고 벌떼처럼 붕붕거리는 데는 뭐가 있다. 무슨 일이든, 어떤 일이든 정착과 안정에는 시간과 시행착오가 있는 게 아닐까? 실수와 실패를 인정 안 하고 용납 안 하는 사회... 슬프다. 승용차가 주욱 늘어서 있는데 대중교통 쌩쌩 달리는 것은 어쨌거나 기분좋다. 하여 승용차 타는 것을 좀 지양합시다. 기름값도 비싸고 경기도 안 좋다는데... ^^ 이 이야기가 아닌데 옆길로 샜다 -, 그것이 한남대교를 지나고 남산밑을 훑은 후에 혜화동 길로 접어드는 동안 그래도 아름다워 보이는 한강다리위에서의 야경과 족발집 앞에서 우와좌왕하는 넥타이 사나이들의 모습과 동대문 시장앞의 시끄러운 알라들 모습들이 창밖으로 지나갔습니다.
미리 정해진 약속도 없고 반드시 지켜야할 시간도 없고 끝내 다다라야할 장소 따위 없이 버스 창가에 앉아서 스스로 정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을 때의 한없는 여유와 너그러움과 넉넉함같은 걸 혹시 아시는지......
그 한없이 나른한 여유가 때로는 한없는 게으름과 무능력과 무의욕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느껴지기전 재빠르게 도둑처럼 누린 후에 다시 너저분한 일상으로의 귀환하는 것도 일케 초라하게 늙는 자의 몇 안되는 특권일 것입니다. -자꾸 얘기가 옆길로 새는군. ^^;;-
뭐 어쨌거나 대학로에 내려서 어슬렁어슬렁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상전벽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참!! 옛맛 따위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발밑에 감기던 포스터 따위도 없었고, 연극 포스터를 들여다 봐도 아는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고, 금요일 밤이면 우글우글하던 문예회관앞 백성들도 안 보였고, 지나가다 한 번쯤 아는 척 인간을 만나는 일도 없었습니다. 대신 휘황한 불빛 가득한 술집과 찻집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여 그렇게 어슬렁거리다 문예회관 앞 계단에 걸터 앉아 편의점에서 산 녹차를 홀짝거렸습니다.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세상에서 나는 뭘 기대하고 문득 발작처럼 대학로엘 가고 싶어 했을까요? 아니 이 말은 그저 감정의 과장을 포장한 말장난일 터이고 사실은 한 때 그곳에서 보냈던 이십대의 마지막 한 해가 다른 어떤 때보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이었기 때문일런지 모릅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걸 향수하기 위해서 나는 그렇게 발작처럼 그곳엘 가고 싶어했던것은 아닐는지......
누가뭐라든 그때는 지금은 아련하게 잊혀진 사람들이 있었고, 좋은 사람과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손잡고 연극을 보고 싶었던 때였고, 연극이 시작되기 전 텅 빈 극장의 고즈넉함도 좋았었고, 그 텅 빈 무대를 볼 때마다 세익스피어를 능가하는 희곡을 쓰고 싶었던 때였고,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사람들과 마시던 술 한 잔이 흐뭇했었던 때였지요.
지금...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그러나 천만에 나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 얄팍한 이율배반의 마음을 느끼며 나는 지금이 그때보다 더 나은가 아니 더 행복한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이렇게 되면 앞에서 한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진술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에 빠지는 것인가요? 후후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 원칭인 '그' 라는 관형어를 붙이면 때든 사람이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필터를 끼고 촬영한 사진처럼 아련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길은 괜히 쓸쓸합니다. 긴 여행이 아닌 짧은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은 그렇게 늘 쓸쓸합니다.
너덜너덜한 일상을 잊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 탓일 겁니다.
바탕골 소극장은 어디로 갔는가... 대신 자리를 차지한 민들레의 영토...
하나도 민들레의 영토 같지 않다. 민들레가 얼마나 척박한 땅에서 꿋꿋이 자라는가를 알면 이렇게 휘황하고 부르주아적이고 제국주의적-?? 돈 잘벌리는 곳 여러곳...에 있는 걸로 안다-인 꼴일 수는 없다.
그래도 건재한 파랑새 극장... 대학로 떠나서도 아동극 많이 보러 다녔었다. 남자친구가-??- 출연을 하거나 무감을 하거나 하는 작품들이 종종 올랐었다. 나중에는 같은 극장에 있던 친구가 그곳의 조명을 담당했었다. 그 친구 좋아하는 빵 사들고 가서 조명실에서 수다떨며 먹던 생각도 난다. 그 옆의 찻집-제목이 뭐드라??-에 들어가면 차범석 선생님을 종종 뵈었다.
역시나 아직도 건재한 낙산가든...
바로 맞은편 건물에 낙산극장이 있었고 나는 거기서 일을 했다. 극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족... 이자 앵콜-??-
오래전 칼럼-벌써 3년 전- <대학로에서... 삶은 누리는 것인지 견디는 것인지>
지난 일요일 어스름한 저녁, 분단장을 곱게 하고 대학로엘 나갔습니다.
전에 앓은 몸살 탓에 다리가 좀 휘청거리긴 했는데 대학로 거리에 서자 왠지 모르게 기운이 나는 듯 했습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가보는 동네였지요.
연극과 젊음과 낭만의 거리...대학로의 이미지입니다.
나이먹어 들어간 대학에서 가끔 수업의 일환-?-으로 연극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본 연극이 내 생애 처음의 연극과의 인연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끄적거림의 시작이 사실 희곡이었고, 신춘문예의 문턱까지 가서 고배를 마신 것도 희곡 부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극판-?-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십여년 전 쯤은...
문예회관 대극장 옆 샘터 파랑새 극장 뒤편으로 떠볶이며 순대며 소주며 우동따위를 파는 포장마차들이 즐비했었고, 연극이 끝나면 거기서 일차를 하고, 주머니 돈이 떨어지면 신문지 깔고 소주와 새우깡을 사서는 바닥에 주질러 앉아, 되도 않게 문학이며 연극에 대한 섣부른 칼질을 했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시퍼런 가슴으로 방금 보고 나온 연극의 대본보다는 훨씬 잘 쓸 수 있으리라는 오만이 새우깡보다 더 좋은 안주였습니다.
그리고 졸업하고 사이비 선생으로 살기 이전, 약 일년간을 다시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이십대의 끝 무렵을 달리던 그때, 연극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 때문에 그걸 하는 것이라는 어느 연출가의 말마따나 나도 그걸 느껴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서툰치기로 연극을 하고 싶다고 자랑처럼 시위처럼 말했었는데 그것이 이루어져 순수한 연극인이 아닌 월급 받는 극장-연극-직원이 되었었습니다.
주머니 돈 한푼 없어도 연극이 끝나면 우루루 술집으로 몰려가던 연극의 스텝들, 단 두명의 관객을 앉혀 놓고 했던 연극.-그래도 막은 오른다?- 바람 부는 거리에서 발밑에 감기던 떼어진 포스터, 파리 크라상 뒤의 담벼락에 붙어 있던 떡볶이 집에서 때우던 점심, 동숭 아트센터에서 보던 초대권 영화들, 김종서, 박정운, 이상은, 심신, 이윤수등 지금은 잘 볼 수 없는 가수들의 콘서트, 그리고 그들에게 환호했던 관객들, 비운의 주인공이 된 송영창의 모노드라마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 그리고 그를 보러 왔던 몇몇의 당시의 탈랜트며 배우들...오프 대학로라고 불렸던 뒷골목의 연극들...
가끔 티비에서 보는 당시의 무명 배우들을 보며 오늘을 위해 그들은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대학로의 관객없는 연극 무대에서 고생을 견디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당시에 만났던 배우들이 티브이나 영화에 나오면 그래서 더 반갑습니다.
토요일 저녁에 길가에서 뒹구는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의 무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 마로니에 잎이 날리던 늦가을 대학로의 고즈넉한 아침 풍경. 그런 아침이 어떻게 그렇게 소란스럽고 수선스런 저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연극인들의 끝이 보이지 않는 궁핍과 그럼에도 꿈을 먹고사는, 그리하여 현실과는 동떨어져 사는 듯한 그들을 보면서 나는, 가슴 하나 가득 돌덩이를 담은 것처럼 무거웠었습니다.
그렇게 꿈만 먹고 살기에 나는 훨씬 약았는지도 모르지요. 그리하여 전락에 전락을 거듭해 지금은 일년에 연극 한 편 보는 것에도 인색을 떨게 되고 말았습니다.
엊그제 본 대학로는 여전히 소란스럽고 휘황한 거리였습니다. 다만 훨씬 호화스런 먹자 위주의 건물들로 변해 있었고, 점점 연극으로 대변되는 이미지보다는 먹고 마시는 소비와 향락의 거리로 보였습니다.
한없는 주머니 가벼움에 시달렸던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의 나는 그 당시보다 훨씬 두둑해지고 여차하면 척 꺼낼 수 있는, 신용카드를 잔뜩 꽂은 지갑을 가지고 골목골목을 누비는데 이상한 쓸쓸함이 나를 훑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명료한 설명을 할 수는 없습니다.
어딘가 아픈 사람을 두고 나혼자 나와 건강하게 사는 듯한 건방진 죄책감 같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일요일 저녁 조금은 복잡한 마음으로 노천 카페-?-에서 밤 한시가 넘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이제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닌, 나그네로서 간 대학로는 한 때 살던 동네를 다시 방문하는 것 같은 쓸쓸함과 아련한 향수가 함께 있었습니다.
나그네들 말고 그 속에서 대학로를 대학로답게-?- 만드는 연극인들이 얼마나 궁핍한-?-생활을 하는지 잘 압니다. 그들은 결코 그 휘황한 곳에서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사실 그들의 공간이 아닙니다. 그곳은 그 가난을 견디고 있는 연극인들이 만들어내는, 낭만으로 이름 붙여진 정서를 누리러 오는 자들의 공간이 아닐는지...
견디는 자들과 누리는 자...
나는 그곳에서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내 삶에 대한 오래되고 불가해한 의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