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문병 다녀오면서...
오애도
2001. 8. 18. 21:42
사촌 오빠가 위암 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와 함게 병원엘 갔었습니다.
걱정과는 달리 환자는 꽤 씩씩해져서 손님이 사온 죽도 한사발 다 먹고 운동을 해야 한다며 병원 복도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엄마와 나는 미심쩍기는 했지만 수술이 잘 되었나보다 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렸지요.
문병 마치고 나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따라나온 올케 언니에게 물었습니다.
경과는 좋은 거지요?
...열었다 그냥 닫았어요...
엄마와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에게는 팔십 다섯을 넘긴 노모가-나에게는 고모님-계십니다.
큰 아들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막내 아들네로 거처를 옮기신 노모는 아들이 머잖아 퇴원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 걱정보다 동생-울 아부지- 보러 가겠다고 자꾸 고집을 피우셔서 큰딸이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번에 우리 집에 오셨을 때 팔십 다섯을 넘기신 두 누이는 병든 동생을 보고 말했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죽어야지... 순서가 그런 것인디 으째 막내가 먼저 이래서 어쩌는겨...
그럴 때 고모님은 장난으로도 아니,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도 병들어 오년을 넘게 버티는 막내 동생보다 당신 아들이 더 큰 병을 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퇴원해 다시 예전처럼 일 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지만 그 가능성이 희박한 이제 오십인 오빠와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이제 칠십이신 아버지와 그 둘을 손 아래로 아들로 두고 있는 머잖아 구십인 고모를 보면서 삶과 죽음의 불가해한 진행 상황을 느낍니다.
결국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순서라는 인간적인 기준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겠지요.
결국 인간은 유사이래 많은 것을 창조하고 발전시켰지만 이 설명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는 참으로 무력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인지 모르지요.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과학과 의학이 더 발달하고 진보한다면 이 불가해한 문제를 풀 수 있게 될까요?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시간이 흐른 후에는 가슴에 자식을 묻는 일 따위는 없을까요?
그 가슴 저미는 슬픔을 과학과 의학은 해결 할 수 있을는지...
병원다녀오는 길이 마음 무게 천근, 발걸음 무게 삼천근이었습니다.
걱정과는 달리 환자는 꽤 씩씩해져서 손님이 사온 죽도 한사발 다 먹고 운동을 해야 한다며 병원 복도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엄마와 나는 미심쩍기는 했지만 수술이 잘 되었나보다 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렸지요.
문병 마치고 나오는 길에 혹시나 해서 따라나온 올케 언니에게 물었습니다.
경과는 좋은 거지요?
...열었다 그냥 닫았어요...
엄마와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에게는 팔십 다섯을 넘긴 노모가-나에게는 고모님-계십니다.
큰 아들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막내 아들네로 거처를 옮기신 노모는 아들이 머잖아 퇴원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들 걱정보다 동생-울 아부지- 보러 가겠다고 자꾸 고집을 피우셔서 큰딸이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번에 우리 집에 오셨을 때 팔십 다섯을 넘기신 두 누이는 병든 동생을 보고 말했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죽어야지... 순서가 그런 것인디 으째 막내가 먼저 이래서 어쩌는겨...
그럴 때 고모님은 장난으로도 아니,스쳐지나가는 생각으로도 병들어 오년을 넘게 버티는 막내 동생보다 당신 아들이 더 큰 병을 안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퇴원해 다시 예전처럼 일 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지만 그 가능성이 희박한 이제 오십인 오빠와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이제 칠십이신 아버지와 그 둘을 손 아래로 아들로 두고 있는 머잖아 구십인 고모를 보면서 삶과 죽음의 불가해한 진행 상황을 느낍니다.
결국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순서라는 인간적인 기준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것이겠지요.
결국 인간은 유사이래 많은 것을 창조하고 발전시켰지만 이 설명할 수 없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는 참으로 무력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한계인지 모르지요.
시간이 흐르고 흘러 과학과 의학이 더 발달하고 진보한다면 이 불가해한 문제를 풀 수 있게 될까요?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시간이 흐른 후에는 가슴에 자식을 묻는 일 따위는 없을까요?
그 가슴 저미는 슬픔을 과학과 의학은 해결 할 수 있을는지...
병원다녀오는 길이 마음 무게 천근, 발걸음 무게 삼천근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