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를 바라보며...
작은 방에 작은 어항이 있다.
한참전에 거실에 잇는 큰 어항에 사는 구피가 새끼를 낳아서 몇 마리를 몇 달동안 키웠었다. 얼마 후에 이젠 제법 커졌다고 생각해서 큰 어항에 옮겼는데 모두 공포에 질려 죽었었다. 하여 마지막 남은 한 마리는 거의 중간 정도로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엊그제 옮겨 넣었다. 결과는 역시나 참패였다. 성질 사나운 다른 물고기의 공격에 어린 구피는 공포에 질려 구석에 꼼짝 않고 나오지를 않는 거였다. 꼬리는 뜯어 먹히고 화려했던 비늘-??-은 벗겨지고...
하여 다시 작은 어항으로 옮겨졌다.
문제는 여기서도 마찬가지... 새끼 밴 암컷 구피가 오늘 낼 출산의 기미가 보이길레 옮겨놨던 터라 어린 수컷과 늙은 암컷이 동거를 하게 된 것이다. 결과는 역시 어린 수컷 구피는 공포에 질려 구석에 박혀 꼼짝도 않는다. 아침에 먹을 걸 주어도 움직일 생각조차 않는다. 한없이 평화로웠던 삶의 터전이 공포의 세계가 되고 만 것이다.
오로지 '크기'만으로 힘의 질서가 형성되는 동물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경험하고 있다. 이제 또 다른 구피 새끼가 태어나면 역시나 이제 어린 티를 벗어난 새끼 구피가 공포의 대상이 되겠지...
약육강식의 논리는 인간과 대비되는 동물을 세계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인간세계에서는 훨씬 교활하고 지능적이고 잔인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물의 세계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공격과 살해라면 인간의 그것은 생존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욕망의 실현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다. 배 부른 사자는 사냥을 하지 않는 것에 비해 더 나은 것,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것이 결국엔 생활의 진보와 삶의 진보-덜 움직이고 더 빨라지고 더 오래 사는 것따위를 진보와 발전이라고 한다면-를 가져오긴 했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과도해져서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의해 인간은 스스로 구속되버리거 마는 것이다.
음.. 물고기 키우며 문득 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