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은행을 줍다!!

오애도 2003. 10. 29. 12:45
엊그제 낮에 서울대공원엘 갔었습니다.
놀이공원과 동물원이 거의 문닫을 시간인지라 밖에서만 어슬렁거렸습니다.
온 산 가득 만산홍엽이었고 세상 가득 바람이었습니다. 낙엽이 휘휘 몰려다녔고, 바람이 짧은 머리채를 흔들어댔지요.
한창 자라느라 꺼부성하고 꺼칠꺼칠한 남학생들과 머리스타일 하나로 멋을 내느라 이마에 납작하게 머리칼을 붙인 교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우루루 재잘거리며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의식하느라 큰소리를 지르거나 수선을 피우는 모습들은 참 재미있습니다.
여자애들은 끊임없이 흘끔거리며 머리칼을 매만지고 남자애들은 괜히 옆친구를 툭툭 건드리거나 목을 조르거나 큰소리로 떠들며 지나갑니다.
그 아이들은 자신들이 가장 빛나고 힘차고 아름다운 시기를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지요?

산이며 들을 말없이 쏘다녔던 어린 시절, 풋풋하고 싱그러웠던 열 일곱 무렵, 세상에 대해 무섭게 진지했던 스물 다섯, 그래도 살만하다고... 세상에게 비로소 따뜻하게 손 내밀었던 서른 세 살 무렵 그리고 후줄근하고 꾸부정하고 후둘거리는 지금 내 나이 마흔...
E 캐스트너의 시던가요? '만약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열일곱 살 때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머지 시간들은 모두 지워버리고 그 열일곱의 나이로 돌아가고 싶다......
아무리 애써도 다시 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것!! 그건 시간을 되돌리는 일이겠지요.

동물원 옆 미술관은 마침 쉬는 날인지라 야외공원조차 한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텅 빈 본관전시실 계단 앞에 쭈그리고 걸터앉았습니다. 오른쪽으로 저녁해가 내 어깨를 결으며 느릿느릿 넘어갔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오랫동안 앉아있었습니다.
무언가 마음 끄는 일도 없었고, 그 전에 마음 들끓게 했던 일들도 그저 맨숭맨숭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는 게 만만해졌다고나 할까요. 무에 그리 동동거릴 일도 집착할 일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멍청하니 앉아 있다가 터덜터덜 걸어 내려왔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붐비게 불고 있었습니다.

저녁에 돌아와 산책을 갔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바람에 떨어진 은행 한 됫박을 주워왔습니다. 아침 내 냄새나는 그것들을 주물러 껍질을 벗기고 씻어 말렸습니다.
산다는 것은 별 게 아닙니다.
가끔 무념 무상에 마음을 씻고, 생각을 씻고 돌아와 냄새나는 은행을 길바닥에서 주워 씻어내는 행위 같은 것!!

가을바람에 마음이 버석버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