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비단붕어 세 마리와 놀다.

오애도 2003. 10. 5. 00:26
시험이 그런대로 끝나가는 터라 모처럼 한가한 토요일입니다.
어젯밤에는 갑작스런 동침자가 생기는 바람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났더니 이 좋은 하루가 반이나 지나갔더군요.

한가한 시간에 가만히 붕어 세마리를 들여다봅니다.
지난 번 집들이 선물로 받은 자그마한 어항인데 비단붕어 세마리가 고물고물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말없고 조용한 생물이라도 생물은 생물인지라 자구 묘하게 정이 들어갑니다.
붕식이 붕순이 붕돌이 어쩌구 이름도 지어놓고 아침에 일어나 먹이 주면서 물끄러미 들여다 봅니다.
지난 번에 이걸 사다준 친구가 이것도 자꾸 보면 누가누군지 구분이 갈까... 했었습니다.
자세히는 구분할 수 없지만 그 중 한 놈이 상당히 수줍어 하는 탓에 그만 년-??-이 되어서 붕순이가 된 것입니다. -근데 물고기의 암수는 어떻게 구분하는겨?-

아침까지 침대옆 사이드테이블에 있던 것을 낮에 책상이 있는 작은 방으로 옮겼습니다.
그 방이 햇빛이 잘 안드는 탓에 엊그제 사다 넣은 초록색 물풀이 색깔이 바래지는데다, 아무래도 작은 방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니 들여다보면서 동무하기도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갑자기 침대방이 휑뎅그레해 진 것같다면 지나친 호들갑인가요?
어쨌거나 당분간 자면서 머리맡이 허전하겠지요.
하지만 이걸 쓰는데 옆에서 촐 촐 물소리를 내거나 버석거리며 돌 헤집는 소리를 듣자니 혼자 노는 아이 옆에 놓고 일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드는 걸요.
그렇게 붕어 세 마리를 들여다 보면서 동물 키우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쯤은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짐승을 보면서 나는 어딘지 모르게 내가 인간으로 태어나고 그들이 짐승으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괜히 원초적인 측은지심같은 게 자꾸 생겨서 키우고 싶은 마음이 안 생깁니다.
반면에 물고기는 이상하게 부러운 대상입니다.
언젠가도 말했듯이 혹 다음 생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물고기로 태어나 맑은 계곡물이거나 깊고 푸른 바닷속에서 살고 싶거든요.

내 어항 속에 비단붕어 세 마리는 행복할까요?

물고기에게 생각이 있다면 분명 불행하다고 느끼겠지요?
하지만 인간으로 산다고 해서 뭐 어항에 갇힌 금붕어보다 더 행복한 것인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 살아 있고, 살아가고, 산다는 것은 늘 그렇지만 불가해합니다.

뭐 붕어로 살건, 사람으로 살건 산다는 건 다 같은 것은 아닌지 모르겟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