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11월의 회색 빛 한 낮에...

오애도 2002. 11. 11. 13:42
잔뜩 하늘이 인상을 쓰고 있습니다.
회색재를 뿌려놓은 것처럼 창밖은 회색빛입니다.

이런 날은 어릴 때 할머니께서 입으셨던 회색빛 스웨터가 떠오릅니다.
유달리, 지지배는 해서는 안되는 게 많다고 하셨던 우리 할머니는 이맘 때 쯤이면 늘 두툼한 회색 스웨터를 입고 계셨었던 걸 기억합니다.
그런 연유로 그 후 오랫동안 아니, 지금도 내게는 십일 월의 파삭거리는 공기와 식어버린
햇빛은 할머니의 그 회색빛 스웨터입니다.

......
......

할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울아부지 생각이 나 줄줄 눈물이 흐릅니다.

지난 월요일 이래로 몇가지 신상의 변화-??-를 받아들이느라 정신이 좀 없었습니다.
그때문인지 이틀 정도 몸과 마음을 함께 앓았습니다.

타이레놀과 쌍화탕을 삼키고는, 이불 속에 누워서 다 지나가지도 않은 올 한 해를 곰곰 되돌아 봤습니다.

울아부지 돌아가신 것의 쓸쓸함 말고, 그런대로 좋은 한 해였던 걸로 생각합니다.
견디기 힘든 마음의 들끓음이나 선명한 고뇌나 어쩔 수 없는 절망따위 없이 그저 선들선들
한 가을바람 같은 나날들이었으니까요.

서른 아홉이라는, 아홉수를 문득 떠올린 것은 지인과 더불어 그 신상의 변화를 얘기하다가
였습니다.

선생님은 아홉이시라 그런지 여러가지 일이 일어나네요...
......
그렇구나. 내가 서른 아홉이구나!
문득 깨달았습니다.

십진법을 쓰는 세상에서 9라는 숫자는 한 단위의 마지막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단위의 시작
이라는 의미가 훨씬 크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19 하면 이미 그것은 10의 단위라기 보다는 20이라는 것의 시작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느낌이 훨씬 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9라는 숫자는 이상하게 나이에 있어서는 훨씬 독특한 무게와 힘이 함께 있는 듯
합니다.

열 아홉 하면 그건 이미 스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느낌일까요?

어쨋거나, 나이에 있어서 숫자는, 기수(基數)로 쓰이기 보다는 서수(序數)로 쓰인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홉이라는 서수는 이미 10이냐 20이냐하는 단위의 문제가 아니라 한 세상과의 결별이냐 아니면 새로운 세상과 조우냐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자... 서른과의 결별이 아쉬운 것인지, 마흔과의 조우가 설레는 것인지 나는 혼란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아홉의 끝달을 한 달 남겨놓고 끙끙 하룻저녁 몸을 앓았고, 다시 마음을 앓습니다.

그리고.... 문득,
지난해 가으내 병원에 계셨던 울 아부지 땜에 가슴도 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