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잘 사는 것만큼 잘 죽는 것도 생각해 봐야지...

오애도 2002. 10. 18. 17:04
정신이 조금 들기 시작합니다.

사과를 깎아 먹고 오렌지 쥬스를 벌컥거리고 널려진 옷가지를 치우고 닷새 동안 못 본 신문들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대충 봅니다.

눈은 튀어나올 듯 아프고, 눈물에, 콧물에, 기침에, 가래에 줄줄 쏟아지지만 그래봤자 후반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짐작으로 압니다.

오렌지 쥬스를 따르며 나는 생각합니다.
아무도 없다는 게 좋다!!

널려있는 방안을 휘이 둘러보며 중얼거립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을 게 분명해서 좋구나...

이렇게 변태적인-??- 즐거움에 빠져 나는 끙끙 앓습니다.
아프다고 엄살 떨어 누구하나 걱정시키지 않아서 좋구, 이렇게 혼자 앓다 보면 남 못하는 숙제를 끙끙거리며 씩씩하게 해치우는 것 같은 자학적인 즐거움이 있다고 하면 궤변일까요?

뻔한 질병-감기 몸살-을 앓으면서 그러나 나는 생각합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다 살고 죽을 때가 되면 안 아프고 죽고 싶구나...

그땐 이렇게 혼자 아프면서 느끼는 즐거움따위는 커녕 외로움과 쓸쓸함에 온몸 서걱이며 괴로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아프면서, 혼자 치뤄내는 큰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래도 내게 아직 응석부릴 울오마니가 계시고, 아직은 튼튼한 형제들이 있고, 나 몸이 아픈 걸... 하면 그래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찾아와 주거나 위로의 말 한마디 쯤 언제고 해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든든한 빽으로 믿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그렇게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없어지거나 같이 늙어 기운 없어지게 되고 나는 내 힘으로 안되는 질병으로 끙끙거리게 되는 일이 있을까봐 솔직히 두렵습니다.

잘 사는 것보다 어쩌면 잘 죽는게 훨씬 어려운지도 모른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엊그제 오면서 고속도로 근처의 산에 널려있던 무덤들을 보면서입니다.

전에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무덤은 누가 뭐라든 죽은 자의 집처럼 보였거든요.
아부지 말년에 왜 산소자리에 그리 연연해 하셨는지도 알 것 같구요.

잘 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잘 죽어야겠습니다.
감기 몸살 따위로 죽는 일은 없으니 이렇게 슬쩍슬쩍 많이 아파놓고 늙어 기운 없으면 안 아팠으면 좋겠습니다.

계절 탓인지 삶의 끝을 자주 생각합니다.

살아온 세월의 길이보다 살아갈 날의 길이가 이젠 조금씩 짧아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 막을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진행과정을 호들갑 떨며 바라보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잘 죽고 싶다는 이런 바램은 어쩌면 가장 수선스런 호들갑인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