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소확행-작지만 확고한 행복-.

오애도 2002. 5. 16. 22:56
음...
이 말은 하루키의 수필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오래된-??-머리 덕분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양반은 무신 내의를 몇 벌 새로 사다가 잘 개켜서 장롱 서랍에 넣을 때 그 소확행을 느낀다고 하더군요.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발음 할 때 나는 느낌이 괜찮아서 일상의 순간순간 떠올려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끔 내게 있어서 어떤 게 소확행인지를 꼼꼼하게 뒤져보기도 합니다.
마음을 뒤지고, 기억을 뒤지고, 생활을 뒤집니다.
기분에 따라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가, 하나도 없었다가 합니다.

내가 가진 미덕 중에 그런대로 쓸만한 게, 별로 투덜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진 것도 별로 없는 주제에, 마음만은 만족하며 씩씩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입니다.
뭐 사실이기도 하구요.
당연히 남을 부러워하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사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는 미덕이자 악덕입니다.
음... 남을 안 부러워 하니까 마음은 편하지만, 잘못하면 발전 없는 인생을 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만약 결혼해서 잘 사는 사람을 부러워해서 나도 어서 결혼해서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혹 성공을 해서 '더블? 화려한... 초라한' 어쩌구 하는 칼럼을 쓰면서 행복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후후후

어쨋거나 이렇게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 내가 별로 겸손한 인간이 못되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엊저녁에 올케 언니한테 전화가 왔었습니다.
아가씨, 결혼해서 아이 낳아 키우는 것도 재미있어요...
이런 말을 듣고 있자면 내가 시집 안가고 이렇게 자알-??!!^^;;- 살고 있는 것이 결혼과 남편과 아이같은 게 싫어서 안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누차 얘기하지만 그런 것은 결코 아닌디... 누가 뭐라든 나는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섣부른 판단은 안 하거든요.

어쨋거나 소확행에 관한 얘기를 하려다가 옆길로 샜습니다.
최근에는 사실 별로 행복하지는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아무리 마음을 뒤지고 기억을 뒤지고 생활을 뒤져도 무엇 하나 행복해야 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한 특별히 불행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불행한 구석을 못 찾는다는 것은 해결의 실마리가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알아야 해결을 하지요. ㅠㅠ

내게는 적어도 4년은 된, 쬐끄만 아이비 화분이 있습니다.
그것을 처음 사 와서, 집에 있는 화분에 옮겨 심었었는데, 그 이후로 삼 년 동안이나 여엉 시들시들 한 것이 줄기가 하나씩 하나씩 죽어가기 시작하더니, 겨우 네 줄기가 남고 말았습니다.
그걸 보면서, 언젠간 저 나머지 줄기도 시들어 빠지겠지 하고 거의 포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작년 봄부터 씩씩한 이파리를 실실 피워 올리기 시작하더니 이젠 제법 줄기가 늘어지기까지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뭔 일이여?!! 회춘인겨? 계란 껍질 얹어 준 것이 직효인개벼!!

그것이 기운을 차려 잎들이 살아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던지요. -미신의 여왕인 나는, 당연히 O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도 아니면서, 그것이 시들거릴 때마다 내생활도 시들거린다고 믿었으므로-
자... 요즈음 찾아낸 소확행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 때문에 내가 우울의 심연-??!!-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올라와 보니,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보인 것이겠지요.
생활이 푸석거린다는 생각이 들 때는, 별거에 다 감동을 받게 됩니다.


사족: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의미로 오래 전 칼럼 '여우와 신포도. 저 포도는 시다. 실까? 시면 어쩌지?'를 올립니다.
가끔 똑같은 얘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 이렇게 퍼다가 올리니 좋군요.^^

어느 날 여우가 숲속을 걷다가 포도 덩쿨을 발견했습니다. 한참 배가 고픈 여우는-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그 포도를 따 먹으려고 했습니다. -뭐 물론 나도 그랬을 것입니다. 배가 고프던 안 고프던 공짠데...^^;;-
그런데 그 포도는 여우가 따기엔 좀 높은데 달려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우는 갖은 짓을 했지만 포도는 아마 꿈쩍도 안하고 결국 여우는 포기한 채로 떠나면서 한마디 하게 되지요.
저 포도는 분명히 너무 실거야. 안 먹는게 좋아.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입니다.
내가 하는 결혼에 대한 얘기가 혹시 여기에 등장하는 여우가 하는 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안 그럴려고 하지만 결혼이란 것 때문에 얻은 소위 소셜 포지션이 싱글-?-인 탓에 그냥 일반적인 결혼 얘기를 해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믿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하다 하다 안되니까 분명 실꺼라고 자기 합리화하는 여우처럼 말이지요.

나는 한 번도 결혼 생활이 실지도 모르니까 안 하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나는 포도보다 더 좋은 게 있고, 그거에 마음을 쓰다 보니 포도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지요. 아니면 포도가 체질적으로 안 맞을 수도 있구요^^;;

어쨋거나 그 포도가 정말 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뭐 포도니까 신 부분도 있을 거고, 달콤한 부분도 있겠지요.
그걸 먹을지 안 먹을지 지금 먹을지 아니면 나중에 먹을지는 순전히 개인적인 선택사항입니다.
나는 한 번도 그 포도 따 보려고 애쓴 적 없는데, 시도도 하기 전에 실패해버린 것으로 받아 들여진다는 것은 억울한 일입니다. 하긴 그거 억울하면 얼른 한 송이 따 먹으면 될 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포도는 왜 안 보이는 거지?-

그런데 말입니다. 그 여우와 신포도에 속편이 있는데......
어느 날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끝에 여우는 그 포도를 따 먹었답니다.
그런데 어찌 됐을까요?
그 포도는 정말 시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우는 그만 둘 수가 없었답니다. 자기가 시다고 말한 것을 따 먹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던 여우는 그 포도를 먹고 먹다가 끝내는 위궤양에 걸려 죽었답니다.

애써 따 먹은 포도가 시어터진 것이라면?
오호 통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