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들 속에서 책 읽기
비가 종일 내리던 일요일 저녁, 다 쓴 볼펜심 리필을 사러 교보문고 행.
흑, 청, 홍 볼펜심 열세 자루를 사고, 영어 필기용 얇은 공책 세 권도 사고, 책 세 권을 사 왔다.
책 사는 걸 자제한 지가 오래인데 그리고 이전 집으로 이사하면서 책의 삼분의 이를 정리해 버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슬금슬금 책은 늘어난다.
그래도 요즘은 사서 얼른 읽고 두 번 이상 읽은 책은 가까운 이들한테 주는 경우가 생겨서 그나마 다행.
내가 좋아하는 작가 김훈의 소설을 오랜만에 한 권 사고, 고 이어령 교수의 책도 다시 한 권.
그리고 맨 위의 책은 가볍게 읽을 생각으로 샀다. 전문 작가가 아니라 성공한 인물의 자전 스토리....
오십이 넘어 실리콘밸리로 떠났다는 표지의 짤막한 서술에 꽂혀서, 60살 중반 쯤 되면 저기 뉴욕의 대학에서 한 2년 쯤 공부하고 오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 요즘의 나에게 으쌰으쌰 해 주자는 마음으로 샀다.
어제 새벽 네 시 쯤 일어나 빗소리 들으며 다 읽어 치웠다.
운전면허 시험 준비만 아니었으면 이미 세 권 다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 이어령 교수의 책.
'마지막 수업'은 석달 전 에 사서 읽은 책이고 그때 오랜만에 1982년도 판 '축소지향의 일본인'도 다시 읽었다.
오래오래 전 내 나이 열 다섯 살 무렵,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읽고 받았던 충격을 나는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그 때 하룻밤 사이에 책을 다 읽고 그 책의 주인이었던 대학생 언니에게 책이 참 재미있더라-??-는 말을 하자 언니가 말했었다.
"니가 재밌을 책이 아닌데..."
그때 내가 그 책을 읽고 했던 생각은,
세상의 사물과 사람과 현상을 이렇게 판단하고 이렇게 읽어내고 이렇게 글로 표현할... 혹은 표현해도 되는 것이구나...였다.
그리고,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깨달은 것을 자유롭게 써도 크게 틀리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솔직하게 망설임 없이 써도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후에 대학에서 영화비평 수업을 들을 때 빛을 발했었다.
그 책을 읽고 3년 후 쯤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나왔고 나는 나오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사 왔다.
그때 대입학력고사 전국 수석을 했던 여학생이 인터뷰 중에 시험 끝났으니 그 책을 읽고 싶다는 말을 했던 것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별 소소한 것을 기억하는 데 유능. ㅋㅋ-
'마지막 수업'을 읽고는 며칠 마음이 먹먹했었다.
초판이 분명했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는-세로 쓰기의 기억?- 이사 오면서 정리할 때 버렸는지 찾을 길이 없어서 다시 사야 하나 고민 중. 그 옛날에 대학생 친척 언니가 책정리 하면서 버리길래 내가 챙겼었다.
나 죽으면 정리해 줄 사람도 없고 혹시나 어디 먼 곳에 가서 살 일이라도 생기면 짐을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드는 요즘인데 사실 읽은 책도 두 번 세 번을 보면 자간과 행간의 울림이 깊고 크다.
하다 못해 오래 전 영어교재조차도 그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행간에서 툭!! 손 들고 나와서 말을 거는 느낌.
이러니 책을 버릴 수 없고 게다가 없앤 책은 또 반드시 다시 봐야하는 일이 생긴다. 흠...
루소의 '에밀'도 근래 읽은 책 중에 굉장이 인상적이어서 지난 번에 찾아왔던 제자를 비롯해 서너 명에게 권함.
나중에 시간이 나면-?- 아주 분석적인 독후감을 쓰고 싶은 책 중에 하나다.
어쨌거나 나란 인간이 동서양의 고전이라고 하는 것을 많이 안 읽어서 사실 좀 부끄럽다. 뭐 죽기 전까지 읽어 보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옳은지 지금이라도 틈틈히 읽어 나머지 삶에 보탬-?-이 되게 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요즘 분명히 문자 속에 파묻혀 있는 느낌인데 결코 책을 읽는 것은 아니었어서 잠시 책읽기 시전.
여름이 성큼성큼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