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백혈병 투병기

아듀~~ 베사노이드!!

오애도 2020. 1. 24. 12:48

엊그제 아침 마지막으로 먹었던 베사노이드 네 알입니다.

아마 다시는 먹을 일 없을 것입니다.

날짜를 보니 정확하게 2년 전 마지막 공고로 항암 주사를 맞았고 더불어 먹기 시작하면서 2년이 지났습니다.

먹기 시작하는 당일이나 다음 날까지 두통이 좀 있었고 입술이 심하게 벗겨지는 것 외엔 크게 부작용도 없이 착하게 착하게 자알 지내왔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약이지요.

또한 기적 같은 치료제이기도 합니다.

3개월에 보름 동안 아침 저녁 여덟 알을 먹으면서 한번도 감사한 마음을 잊은 적 없었고 실수로 빠트린 적도 없었습니다.


하여, 참으로 고마웠다네. 착한 베사노이드여!!


사실 별 것도 아니었는데 약 먹으며 치료 중이라고 환자 코스프레 하는 2년 동안은 어떤 의무감에 휘둘리지 않고 날건달처럼 살겠다는 결심을 했었습니다.

한가하고 느긋하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일들 중에 즐거운 일만 골라서 하리라...

뭐 결론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일로 생각보다 엄청 바빴다는 것.

 친구가 하는 쥬니어 전문의 속옷 가게에서 일주일에 한 두번 아르바이트 한 것도 그나름 즐거웠고 -생각보다 나한테 판매직에 재능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ㅋㅋ 어떤 세계든 배울 것이 있고 깨달을 것이 있으며 욕심을 버리고 진심을 다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앎-

널럴하긴 하지만 저탄고지를 2년 넘게 잘 유지하고 있으며-덕분에 평생숙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됐고 사람의 몸의 원리에 대해 무서울 만큼 많은 것을 깨닫게 됨- 무엇보다도 원하는 만큼의 영어공부를 해치웠습니다. 뜻하지 않게 새로운 사람들과 맺게 된 새로운 인연들로 내 생애 가장 보람있고 유쾌하게 지내고 있는 중입니다.

단기 기억력은 놀라우리만치 쇠퇴했지만 반대로 현상에 대한 통찰력은 또 놀라우리만치 강해졌음을 실감합니다.

크게 걱정되거나 두려운 것도 없고 쓸데없이 동동거려지는 일도 없습니다.

하여 얻은 것만 잔뜩이었던 2년입니다.

버리거나 마음을 거두는 일로 오히려 얻은 자유까지 합치면 메가톤급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안 해도 되는 자유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보다 쉰일곱배 쯤 중요합니다.

내가 가지지 못하거나 없다고 해서 가진 것 많은 사람들에게 눈 흘기거나 침 흘려 본 적 없는,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착한 겸손함-??? 뭐래...- 덕분에 나는 생각과 마음과 정신이 부자입니다.

없는 것 많아서 누리는 자유로움 잔뜩이고 소소하게 갖고 있는 것들은 온전히 다아 내 것이니 가진 것으로 치면 이건 뭐 거의 재벌급입니다. 하하하

버리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없어서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크기를 충실히 실감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버리는 것은 사소한 물건이 아니라 탐욕과 질시이고 없어서 자유로운 것은 쓸데없는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과 이기심...입니다.  

덤으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지만 늘 삶의 끝을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아니라 언제 오더라도 툭툭 털고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또한 지금의 '나'가 얼마나 빛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


문득 울 엄니가 보고 싶은 까치설날입니다.

그곳에서 자알 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