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감기랑 씨름 중이다.
얘가 나아야 화요일 2차 항암을 할 텐데 또 불가능하지 싶다. 여전히 초기감기처럼 콧물도 났다가 재채기도 났다가 얕은 기침도 났다가 깊은 기침도 났다가... 널을 뛰는 상태다.
다행이 열은 나지 않아서 자체 면역력으로 낫게 하려고 약도 안 먹고 버티는 중이다. 보통 사람도 요즘 감기 한달이라는데 그런 의미로 나는 보통 사람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연 사흘째 사실 무리를 했다. 목요일엔 혼자서 덕수궁엘 간다고 나갔다가 돌담길만 돌고 수유리 친구한테 가서 열한 시 넘어 들어왔다.
금요일은 친구가 점심 사준다고 코엑스 가서 점심 먹고 놀다가 우리 집에 와서 다시 띵가띵가... 어제는 푹 쉬어야지 했다가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 하다가 만나자!! 가 되어 다시 멀고 먼 수유리까지 가서 이바구하다가 열 두시에 들어왔다.
그리고 며칠 째 잠의 질과 양이 형편없다. 아무리 애써도 잠님-놈??--은 찾아와주지 않아서 거의 밤을 샌다. 그러니 감기가 나을 리가 없다. 흠...
오늘은 환자인 척 집에서 뒹굴거리다 쌀이 떨어져 시장엘 다녀왔다. 쌀도 사고 고기도 사고 과일도 사고...
고기만 먹는 대신 밥을 먹으니 기운이 썩 예전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원한 이래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듯하다. 해야할 일도 아무것도 없고 어떤 것에도 마음을 다해 몰두할 수가 없다.
책은 화장실에서만 읽고 시간은 널럴한데 바느질도 안 한다.
특별히 아픈 데는 없으면서 나는 왠지 병이랑 토닥토닥 두런두런 하면서 내 방에서 지내고 있는 느낌이다.
중심정맥관 수술 자리에 붙여 놓은 테이프 때문에 근질거리고 물집이 잡혀서 가장 성가신데 그걸 소독하고 있자면 그제서야 나는 진짜 환자라는 생각과 비로소 병마와 싸, 우, 는, 느낌이 든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그래도 순간순간 죽음과 죽는 순간을 생각한다.
많은 것들을 정리해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정리하고 비우고 치워서 가볍게 해 놓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비장하지도 쓸쓸하지도 않게 하루에도 몇 번씩...
작년 이맘 때 했던 청소년 연극제 심사 부탁이 왔다. 하필 병원 날짜와 겹쳐서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컨디션으로는 날짜만 겹치지 않았으면 사흘 쯤 연극 보고 심사하고 리뷰 쓰는 일은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쓸쓸해졌다. 그래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툭툭 일상의 발목을 잡히는구나...
울엄니 가신지도 엊그제가 일년이었다.
연극제 심사 부탁을 받으며 비로소 지나가는 일년을 실감해냈다.
그렇게 시간 혹은 세월을 세는 단위는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