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과 깃발. 그 대립 항 없는 것들의 대비 <역적> 깨알리뷰
길동 이야기 속에 줄기차게 이어지는 행동이 신발에 관한 것입니다.
아버지 아모개가 주인을 살해하고 돌아와서 잡힐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얼른 아버지의 신발을 아궁에 넣어 태웁니다.
아모개가 풀려 나왔을 때 역시 어린 길동은 아버지를 위해 새 짚신을 놓아줍니다. 동생 어리니에게 마지막에 준 선물도 꽃신이지요.
신발은 육체를 담고 다니는 도구입니다. 그 육체 속에 영혼이 있고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고 그 둘이 만들어낸 신념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신발은 그 몸을 담아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 발로 길을 걷듯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지요.
흔히 꿈에서 신발은 자신의 현재 속해 있는 위치를 의미합니다. 남자가 꿈에서 신발을 잃어버리면 직장을 잃거나 결혼한 여자가 신발 한짝을 잃으면 남편과 헤어지지요. 신발을 바꿔 신으면 남자를 바꾸거나 남자가 바꿔 신으면 직장을 바꿉니다. 어떤 의미로 꿈은 그 개인을 이루고 있는 관습적인 것들을 상징화해서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런 의미로 신발은... 그 주인을 담고 있는 조직이자 사회인 것이지요.
낡고 낡은데다가-고단함-. 피-살인-까지 묻어있는 아버지의 신발을 불 속에 던지는 어린 길동의 행위는 하여 아버지의 이전의 삶에 대한 지움 혹은 버림을 의미합니다.고단함과 어쩔 수 없는 범죄로 얼룩진 아버지의 삶을 없애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감옥에서 나온 아버지에게 내미는 새 신은 아버지의 새로운 삶을 의미하겠지요. 이야기 속에서 그 후 아모개의 가족은 몸 담았던-신- 고향을 떠나 새 삶을 시작하고 새로운 신분을 얻습니다. 후에 충원군의 시종이 되면서 길동은 ‘발판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발과 발판이...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 디디고 혹은 밟고 올라서야 하는 것. 그 시대의 백성들... 발판이 무너지면 그것을 밟고 올라가는 이는 떨어지거나 다치게 되지요. 그렇게 다중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9회차에서 연산은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깃발은 가장 높은 곳에 있거나 앞에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육체에 속해 있지 않지만 깃발의 미덕은 높은 곳에 있어야 발휘되는 것입니다. 늘 올려다봐야 하는 것이고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깃발은 공허합니다. 그 속에 담긴 것은 실체 없는 공허한 의미, 즉 기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병사들은 깃발을 앞세우고 싸우지요. 승리하면 깃발을 앞세우고 돌아오며, 패배했을 때는 백기를 든다고 하지요. 또한 깃발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패배의 기호학적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깃발은 군중 혹은 무리 속에 있을 때 빛을 발합니다.
성종이 아들 연산에게 깃발이 되라는 말은 그 공허한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라는 의미이겠지요. 그리고 ‘무리’ 속에서 ‘무리’들 위에 서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비록 공맹이라는 허상의 깃발이라도 말이지요. 그들과 싸우지 않는 것이 어린 왕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는데 좀 더 수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산은 새로운 깃발을 세우고 새로운 깃발이 되려하겠지요. 좌절의 예감 가득한 시도가 얼마나 비극적일 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에 대한 지식 덕일 겁니다.
신발이 형이하학적이라면 깃발은 형이상학적입니다. 물리적으로는 하나는 아래에 있고 하나는 위에 있어야 제구실을 합니다. 길동은 아래에 있고 왕은 위에 있지요. 왕은 백성이라는 신발을 신고 깃발을 신봉합니다. 그것의 위치가 바뀌는 것이 혁명입니다. 신발을 신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깃발을 신봉하지요...
깃발과 신발... ‘발’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짧은 라임.
그렇게 이 드라마는 신발과 깃발, 육체와 정신, 아래와 위, 양반과 상놈, 노비와 임금, 영혼의 고결함과 신분의 천박함 같은 대립 항들을 꽉 짜인 얼개로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