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방송의 변
어쩌다 오래 전 글을 검색하다가 이 글을 발견했습니다. 2003년 6월 3일에 쓴 것인데 무려 10년도 더 지난 글입니다. 1500편이 넘는 글이 있는데 어떤 글은 전혀 기억이 없고 어떤 글은 작은 에피소드 같은 게 잊혀지지 않아 인상적인 것도 있지요. 이 글은 뺨맞은 이야기를 썼던 것만 기억하고 있는데 그게 이렇게 오래 된 글인지는 몰랐습니다.
늘... 합쇼체 문장을 쓰다가 일반적진술 문장으로 썼다는 것도 이제 기억이 납니다.
아마 그날 내게는 아주 드라이 퍽퍽한 날이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내 글을 봐도 안녕하십니까? 수준으로 생경할 때가 있습니다. 흠... 하여 재방송 카테고리를 하나 만들어 5년 이상 전에 글들 가끔 올릴 생각입니다.
<제목>유 월 입구에서...
나는 며칠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
또한 별 일도 안 하고 살았다.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은 찾으면 얼마나 많겠는가.
묵은 빨래나
널려진 잡동사니나
시간 내어 만나고 싶은 사람이나
받아 놓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마사지 크림을 바르는 일이나
마음 고요하게 읽고 싶은 책이나
그저 널럴하게 거리를 걷는 일이나
시간 들여 해야하는 몇 가지 음식 재료들이나.......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소한 것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것들은 어린 강아지가 착한 주인의 눈길을 기다리듯 내 주위를 서성인다.
그러나 나는 모른 척 한다.
종일 어영부영 그냥 살아지고 만다.
신문을 설렁이거나 -꼼꼼히 읽지 않고-
고스톱 게임을 하거나
그저 앉아 있거나
오래된 밥을 부엌 싱크대 앞에 선 채 먹거나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머리 가벼운 책 반 페이지를 읽는다.
제대로 된 신발은 싫고
틱!!
슬리퍼가 좋다.
성능 좋은 오디오가 있다는 것도 잊었고,
고급스런 색조 화장품이 있다는 것도 잊었고,
잘 빠진 여름 구두 있다는 것도 잊었고,
책장 가득 좋은 책들이 있다는 것도 잊었고,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있는 어릴 적 친구가 여럿 있다는 것도 잊었다.
엊저녁 수영장 샤워장에서 틱 물을 틀었는데 그만, 샤워기가 소금뿌린 미꾸라지 마냥 발광을 하는 바람에 옆에 있는 여인네의 늙은 피부에 그만 찬물을 잔뜩 튀겼다.
하나마나한 말이지만 수영장은 찬물이다.
그 찬물 수영장에서 나와 뜨듯한 물에 담갔던 아줌마의 늙은 살갗은 화들짝 놀랐으리라.
지금 막 찬물에 온몸 담갔던 기억은 잊고, 그렇게 샤워기로 뿌려지는 물은 피부에 얼마나 진저리나게 차가운지 모른다.
아줌마는 엄마야 했고, 나는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를 연발했다.
잠시 후 여인네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묵은 때를 밀었고, 나역시 아무일 없다는 듯이 더운 물에 몸을 담갔다.
인생이란 이렇게 느닷없는 것에는 속수무책이다.
느닷없는 우울이나
느닷없는 무기력이나
느닷없는 식욕부진이나
느닷없는 무신경 같은 것에 당하고 사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지하철에서 막 내리려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느닷없이 내 뺨을 쳤었다.
나는 기가 막혀, 맞은 오른 쪽 뺨을 감싸쥐고 그 남자를 멀뚱 바라봤는데 그 남자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남자가 내 대신'여보 당신 미쳤어?' 하고 화를 냈고, 나는 너무나 기 막히고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했었다.
내 대신 화를 내고 있던 남자가 그냥 가시라고 하며 등을 떠밀었고 내 등뒤에서 싸우는 소리가 났었다.
가끔 나는 뜻하지 않는 것들과 맞닦뜨릴 때면 그때 일이 떠오른다.
때때로 일상은 그렇게 느닷없이 호되게 뺨을 때리고 달아나는 인간처럼 보인다.
그 낯선 남자에게 내가 왜 맞았는지 그 때 몰랐듯이 무기력 무의욕 무신경 무덤덤에게 얻어맞는 이유를 나는 모른다.
계절 탓이다.
찬물 세례를 받고 엄마야하는 한마디만으로 잠깐 동안의 진저리가 가라앉듯이 그렇게 나는 시간탓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