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태풍 속에서...
이제는 정말 싫다는데... 그동안 쌓아놨던 정나미마저 다아 떨어져 보기만 해도 넌덜머리 나는데... 이전의 마음이 뻑갔던 아름다움이나 매력도 퇴색해 안 보는게 행복일 지경인데... 그래도 주구장창 갖은 핑계를 대며 옆에서 어슬렁대는 옛연인처럼 비는 내린다.
싫다싫다 하면 더 매달리는, 가라가라 하면 더 뭉그작대는, 지겨워지겨워 하면 더 수선스러워지는 밉고 싫은 인간처럼 그렇게 비는 내린다.
다섯 시쯤 일어났다.
비몽간에 주룩거리며 빗소리가 들리길레 머리맡의 창문을 탁!!! 닫고 더 자려는에 갑자기 이건 너무 심하잖아!! 하는 생각이 들어 벌떡 일어났다.
태풍이 온다는 예보도 들었고 피해가기 어려울 거라는 얘기도 알고 있었지만, 마치 갖은 핑계대며 눌러앉으려는 징그러운 무전취식의 손님같은 느낌이 드는 건 자연에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때로 빗소리는 혹은 비 오는 날은 낭만적이지만 이 와중에 낭만 어쩌구 하면 미친넘-??!!-이 분명하다.
농사짓는 사람도 아니면서 괜히 농사걱정 하기 시작한 지 오래인데, 이건 그냥 뭐랄까 실패한 사람들에 대한 마음쓰임이다. 그런 이유로 난 홈런 친 타자가 돋보이는 게 아니라 홈런 맞은 투수가 훨씬 더 마음이 가고, 케이오승 한 복싱선수보다 당한 선수 보기가 불편해서 어느 순간부터 권투 보는 걸 안한다. 어느 날부터 비극적인 스릴러 영화보는 게 힘에 부치는 것 하고 비슷한 거겠지.
창문 열어놓고 앉아 있는데 책상 위로 휙 빗살 들이치고 행운목 잎에 펄럭펄럭 넘어질듯 바람이 몰아치길레 문을 닫았다. 흠... 이런 일은 처음인데 태풍은 태풍인 모양이다.
하~얗게 기분좋~게 폭폭 삶아 말려서 개켜놓은 수건이 다시 눅눅해졌다.
겨우 방안에서 태풍을 맞으며 마음이 들끓는다.
사족:: 생각해보니 1990년 9월 1일에 태풍으로 인해 서울에 엄청나게 비가 내렸었다. 금요일이었고 너무 비가 내려서 휴강을 했을 정도였는데 정말 멀미가 날 지경으로 쏟아 붓던 기억이 선명하다. 흠... 정확하게 20년 전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