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거대함과 미세함 사이의 초라

영화 발키리... 그 이중적 의미에 관한 소고

오애도 2009. 1. 25. 11:26

한 때, 영화가 이렇게 난무하는 시대가 아니었고, 그것이 대표적인 문화의 코드가 아닌, 가끔 누리는 호화스런 대중 예술의 향수-享受-로 격상돼 있었을 무렵에 나는 영화광이었습니다.

기껏 티비에서 해 주는 주말 영화들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연인과의 약속시간 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기도 했지요. 영화 소개를 하는 고 정영일씨의 목소리와 표정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신문의 주말 영화 안내에 찍혀있었던 우표만한 영화장면 사진도 인상적이었으며 그렇게 synopsis 보는데 익숙해져 배우지 않고도 나는 아이들에게 시놉시스 쓰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닙니다. 어찌된 일인지 영화 보는 일에 멀어져서 그만 재탕에 재탕을 거듭해 멀건 국물이 되 버릴 정도로 티비에서 여러번 해 주는 영화 조차 안 보게 된지 오래됐습니다. 영화 보는 일에 꽤 시달리는데 특히나 스릴러나 공포물, 비극적 결말을 갖고 있는 영화들은 더어 그렇습니다. 어딘가 감성이나 감정을 주관하는 신경이 아주 얇아지고 가늘어져서 그만 적은 자극에도 큰 충격을 받는 모양입니다. 나이 먹어 머리칼이 가늘어지듯이 말입니다. 하여 머리 가볍고 밝고 유쾌한 영화가 좋습니다. 

 

 

 

 

 발키리는 내가 달가워하지 않는 몇몇 요소들을 다 갖고 있습니다. 비극적 결말에다-히틀러는 암살당하지 않았으므로...- 선 굵은 남자들 영화이며 게다가 스릴스릴하는 긴장용 영화였으니 말입니다.  당최 긴장하는 게 힘에 부쳐서요. ^^  어쨌거나 그러거나 말거나 친구에게 질질 끌려가-??- 보고 말았습니다. 물론 보고 나면 좋은 영화는 좋습니다.

 발키리는 게르만 신화에 나오는 요정입니다. 주신-主神- 오딘을 섬기며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인간계에서 전쟁 중에 죽은 용감한 영혼을 데려오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영화에서는  히틀러 자신이 위기에 처하거나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를 대비해 놓은 예비군대지요. 절대 신이든 절대 통치자든 절대자를 호위한다는 의미는 같습니다. 

 히틀러 암살시도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니까 결말은 이미 나 있는 것이었고 그것이 어떤 과정에 의해 실현됐는지에 대한 것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물론 나는 옳은 것을 위해 삶을 바치는 선 굵은 남자들을 좋아하니까 캐릭터들은 멋있습니다. 다만 작전 과정에 대한 내러티브가  많은 비중을 차지해서 긴장도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여 요즘 할리우드 식 블럭 버스터의 강한 비쥬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어떻게 실패했는지는 스리슬쩍 넘어가서  뭐야? ???-가 되버렸습니다.

 어쨌든 영화는 선 굵은 남자들 영화입니다. 배우들은 하나같이 묵직하고 경륜을 느끼게 했는데 특히 나는 케네스 브래너가 멋있습니다.  탐 크루즈 멋있는 것은 그냥 객관적 사실진술이니까 넘어가겠습니다. ^^

 어쨌든 작전은 실패해서 -이건 이미 나온 결론이니까 스포일러는 아니라고 우기겠습니다.-주동자들은 처형을 당합니다.

 

 

 

정의에 대한 신념, 그리고 그것을 위해 싸웠던 그들은, 어쩌면 용감한 영혼으로써 설화 속에 나오는 발키리들에 의해 주신-主神- 오딘에게 갔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 제목은 그렇게 비밀스럽고 능청스럽게 다중적인 의미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아름다울 때는 옳은 신념을 갖고 그 신념을 위해 자신을 바칠 때 일 것입니다. 눈 앞에 보이는 이익이나 작은 명예나 섬세함으로 포장된 쪼잔한 남자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멋있는 남자는 어데 있는지...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니까 지금같은 난세에 나올 때가 된 건 아닌지...

진짜 남자가 그립습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