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상, 삶, 그리고...

겨울 논 가운데서 보던 서늘한 달!!

오애도 2002. 2. 27. 01:22
정월 대보름이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날이 날이니만큼 열 나흩 날 저녁에 백화점에 가서 일인분씩 포장된 나물이라도 사다 먹을까하다 어영부영 지나고 말았습니다.

다행이 보름날 아침, 주인집 아줌씨가 무려 일곱가지나 되는 나물을 주시는 바람에 맛있게 먹었습니다.
거기다 엊그제 친절한 학부형이 보내주신 맛있는 김으로 복쌈도 싸 먹었구요. -그래도 할 건 다 합니다^^-

뭐 오곡밥 같은 건 과히 좋아하진 않지만 보름날이면 울엄니가 들기름에 달달 볶아 주시는 시래기 된장 볶음, 호박고지 나물, 무 나물, 가지나물, 취나물같은 게 무지하게 생각나더군요.

먹고 자프다!!

어렸을 적, 대보름 전 날 집집마다 밥을 얻으러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일찌감치 저녁밥을 해먹고, 친구들과 함께 커다란 양푼이나 바가지 같은 걸 가지고 다니면서 친구집을 시작으로 동네 한바퀴를 도는 것입니다.
아줌마 밥 좀 줘유...하면 어른 들은 한덩어리씩 우리가 가지고 간 그릇에 밥을 주곤 했지요. 혹 여기까지 읽고 동냥 아냐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보름날 밥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어야 좋다는 속설이 있답니다.
그런 이유로 보름 전날 저녁에 그렇게 그릇을 가지고 돌아다니다 보면 밝은 달빛 아래서 우리같은 그룹들을 여럿 만납니다.
그리고 밥을 훔치는 것이 더 좋다는 말도 있던 터라 사알짝 부엌에 들어가 솥단지 안에 넣어놓은 -일부러 가져가라고 넣어 놓음-밥을 폭 쏟아 오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어느 땐 장독대 위에 보름 떡을 해서 치성-??-드리느라 올려 놓으면 시루째 쏟아가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얻은 밥을 가지고 친구집 사랑방에 모이는 것이지요.
전기도 안들어 오던 그때, 방문을 열면 컴컴한 숲이 시커멓게 드리워져 있는 그 방에서 우린 밤을 새기로 결심을 하지만 겨우 열살 남짓한 아이들에게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텔레젼도 라디오도 없고, 볼만한 책도 없는 상황에서 한시간은 얼마나 길던지...
그리고는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았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눈 떠 보면 아침이었습니다.

혼자서 쓸쓸하게 이웃에게 얻은 나물로 보름을 쇠자니 옛생각도 나고 엄마 생각도 납니다.

지금은 우리 자식들 모두 떠나버린 적막한 집과 그렇게 보름밥 얻으러 다닐만한 젊은이 없이 노인들만 남아 있는 고향 마을을 떠올리자니 쓸쓸해집니다.

다시 돌아가 식구들 모두 모여 보름 나물을 먹을 날이 있을는지...
아마 없겠지요...
자꾸 옛날 얘기하면 늙은 것이라는데... ^^

논 한가운데서 바라보던 둥근 보름달이 주는 가슴 서늘한 감동을 다시 느껴봤으면 좋겠습니다.